땅도 사기 전에 은행부터
대출이 첫 관문이다. 땅을 찜해 놓는 것은 우리 맘이지만, 그 땅이 우리 것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물론 돈이 매우 넉넉하고 번거로운 일들을 처리해 줄 대리인도 있다면 다른 문제겠지만.
일정이 다 사라져 심심하던 9월, 한 달 내내 나는 집 짓는 일에 관한 일정으로 하나씩 채워갔다. 사실 내 일정이 문제가 아니다. 여러 사람 일정을 맞추는 게 장난 아니다. 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일하랴 애 키우랴 바쁜 틈에 다 같이 만나려니 날짜 잡는 게 난제다.
그나마 내 집, 네 집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주택이라면 덜 복잡할텐데 우리가 지을 상가주택은 다가구주택이다. 늘 헷갈리는 '다세대주택'과 '다가구주택'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각 세대별로 명의를 따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다세대주택은 공동주택으로, 다가구주택은 단독주택으로 분류된다. 고로 우리는 땅이든 건물이든 통째로 명의를 넣고 통째로 사고 파는 것만 가능하다. 공동명의만이 답!
같이 살기 싫어지면 빈손으로 나가?
자매 셋 사는 집에 누가 들어오겠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치고는 너무 섬뜩한가? 이보다 더한 운명공동체가 또 어디 있을까. 따로 또 같이 객지 생활을 해오다 뿔뿔이 흩어진 지 10여 년 만에 대식구가 되어 모여 사는 일에 핑크빛 꿈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힘든 상황들이 닥쳐도 충분히 해결해나갈 자신감과 의지가 있다. 설마,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
드디어 토지 계약서를 쓰다
땅 계약하는 데에도 대출 신청을 하는 날에도 꼬박 하루씩 잡아먹었다. 계약 날에는 나와 동생 둘, 제부 하나가 참석했다. 부동산사무실에 도착하니 우리를 차에 태워 인근의 다른 부동산사무실로 이동했다. 토지 주인이 매물을 의뢰한 부동산은 따로 있었다. 요즘 대부분이 그렇듯 부동산끼리도 협업 시스템으로 운용한다. 서로의 매물을 소개시켜 준 후 성사되면 수수료를 나눠 갖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매도자의 수수료는 그쪽 부동산에, 매수자인 우리의 수수료는 우리가 의뢰한 부동산에 낸다.
계약이라는 것이 매매 전체 금액 10%의 돈만 내고 간단히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잔금 치를 날짜를 잡고, 등기부등본을 확인하고, 매도자 본인과 신분증을 대조해 확인하고, 기타 염려스러운 부분들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현재 토지에 건축 허가를 넣어놓은 상태라 우리가 다시 설계를 의뢰하여 건축 허가를 다시 받을 때는 그쪽에서 파주시에 전화해 취소를 해줘야 한다. 그런 부분들은 계약서 특약사항에 넣기로 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려니 은근히 시간이 걸렸다.
"혹시, 고향이 충청도 아니에요?"
서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서류를 훑어보던 중에 그쪽 부동산 젊은 여자사장님이 조심스레 묻는다.
"예, 맞아요. 충남 OO이 고향이에요."
"아, 역시! 나 OO여고 출신인데!"
나만 빼고 동생 셋 다 OO여고 출신. 우리 넷 다 OO여중을 나왔으니 그분은 우리 모두의 학교 선배인 셈이다. 서류를 많이 봐온 사람답게 그분은 우리 주민등록등본을 보다가 주민번호 뒷자리가 비슷해서 동향 사람이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연도를 따져보니 우리 언니보다 두 살 위였다. 한 다리만 건너면 바로 '누구네 집 몇째 딸' 나올 것 같아 거기까지만 하고 멈췄다. 역시 세상은 참 좁기도 하다!
학교 선후배라는 공감대와 함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계약은 잘 이루어졌다. 한두 가지 부동산에서 일부러 말하지 않은 듯한 건이 있었지만 넘어갔다. 실수로 깜빡했다고 몹시 놀라듯 변명했지만 아닌 티를 눈치챌 만큼은 우리도 순진하지 못했고,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하는 아량도 생겼다. 나이 덕인지 나이 탓인지. 완전한 매매 후 등기까지 마쳐야 우리 땅이 되는 거지만, 일단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이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진짜 우리 공동의 땅이 생기긴 하겠구나.
드디어 대출 신청을 하다
대출은 우리의 힘을 더 많이 빠지게 했다. 토지에서 가까운 은행에 두 군데 가봤는데 한참을 기다려 상담하니 생각보다 대출 가능 액수가 적었다. 당시 아파트 대출이 다 막혔느니 어쩌니 말이 많았지만 아파트 대출은 그나마 쉬운 거였다. 하긴 10여 년 전 우리도 그런 이유로 아파트 청약을 했으니 당연한 일인가.
토지에 대한 대출 액수는 생각보다 적었고, 그나마 많이 해주는 곳은 제2금융권에 속했다. 막연히 제2금융권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꺼려지긴 했지만 지금 토지 주인도 그 은행에 대출을 해놓은 상태였다. 대출 승계를 받을까도 했지만 괜히 불편할 것 같아 따로 상담 날짜를 잡았다.
세상에나, 대출에는 정말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다!
담보대출 구비서류 안내
인감증명서 2통(본인발급용)/주민등록초본 2통/주민등록등본 1통/국세납세증명서 1통/지방세납세증명서 1통/재산세납세증명서 1통/지방세 세목별 납부증명원 1통/임대차계약서 1부/전입세대열람확인서 1부/재직증명서 1통/소득증빙자료(근로원천징수영수증), 사업자등록증사본 1부, 등기권리증, 실명증표 사본, 인감도장, 신분증, 농지원부(있을 경우 제출) 또는 경영체확인서 1부
○○인삼농협 대부계 담당자에게 온 문자를 보고 쓰러지는 줄 알았다. 이게 다 뭔 서류들이란 말이냐.
등기 분야 일을 오래 해온 동생에게 은행에서 온 문자를 넘겼다. 동생이 매매 계약, 대출, 등기까지 서류를 담당하기로 했다. 담당자와 통화한 후 동생이 챙길 것은 챙기고 각자 준비해야 할 서류들만 따로 정리해 알려줬다. 친절하게 어디에서 발급받아야 하는지도 일일이 표기해서. 인터넷 발급 가능한 것들은 사이트까지, 주민센터에 가야 하는 것은 그것대로.
그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번거로운 일들은 끊임없이 생겼다. 일단 인터넷 발급 가능한 서류들을 준비해놓고 주민센터로 갔다. 지방세 세목별 납부증명원을 요청했는데 그런 서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은행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주민센터 공무원과 연결을 해주고 나서야 그들이 대화 끝에 건네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아, 세상에는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은행마다 서류들이 너무 다르고 업데이트도 잘 안 되고, 간혹 주민센터 공무원이 모르는 경우도 있어서 이런 문제들이 종종 생긴다는 것이다. 그나마 주민센터 공무원이 노련한 편이라 얼른 해결해준 거라나.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이런 과정으로 각자 준비한 서류들을 확인 또 확인하고 약속 당일 은행을 찾아갔다. 뭔가 하나라도 잘못되면 큰일이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대출은 평일에만 가능한데 동생 둘이 회사에 또 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고, 누가 대신 갈 수도 없이 명의자 모두 참석해야 한다.
'○○인삼농협'에 들어서자 우리는 룸으로 안내되었고(오호 여긴 작은 데라 우리도 VIP가 된 건가!), 거기서 두 시간 가까이 죽치고 앉아있었다. 홍삼 음료도 주고, 홍삼 캔디도 주고 인삼농협 이름답게 정겨웠다.
공통 서류와 개인별 서류 따로 정리된 파일을 내미니, "이렇게 서류 정리를 잘 해서 가져오신 분들은 처음 봐요."라고 대출 담당자가 좋아한다.
동생의 해온 업무가 그렇기도 하고 빨리 일을 처리하고 강남의 회사까지 다시 가야 하는 절박함이 낳은 결과라고나 할까.
대출이 그날 이루어지는 건 절대 아니다. 잔금 치르기로 한 날 실제 대출이 이루어지게 되고, 승인이 나면 곧바로 매도자에게 입금될 수 있도록 미리 수수료나 인지대 등을 넣어두었다. 대출을 받으며 이율을 조금이라도 낮추고자 주대출자 동생은 준조합원 가입을 하고(조합원 가입은 인삼 농사 짓는 사람만 가능하다), 다른 동생 하나는 보험상품도 가입했다.
역시 인삼농협답게 서류 제출을 끝내고 홍삼음료 한 상자와 홍삼 캔디를 건넨다. 이 모든 과정들이 골치아프기는 하지만 은근 재미있기도 한 건 내 성격이 좀 이상해서일까? 새로운 경험들은 가끔 나를 설레게 한다.
주변 다른 건물 등기부등본 기억이 났다. 매매가 12~16억 건물들의 대출이 3~5억 정도였다. 아파트처럼 60~70% 대출이 절대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마도 그게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어있는 건물들이 제법 있었을 거다. 보통 건축업자들은 대출을 최대치로 받아서 짓고 세를 주거나 팔거나 하니까.
집을 지으며 되도록 대출 비율을 낮추려고 노력은 해야 하지만 집 짓는 동안 자금 문제를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은 되었다. 넷이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애초에 혼자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 뭐.
토지 계약을 하고 나서도, 대출 서류를 접수하고 나서도, 우린 여유 있게 점심 한 끼 먹지 못하고 급히 헤어져야 했다. 하지만 괜찮다. 이 모든 것은 다음 해 여름 우리에게 와줄 '그날'을 위해서니까!
토지 계약 2000년 9월 19일, 대출 서류 접수 9월 29일. 우리가 목표로 하는 '그날'이 2021년 8월쯤 되니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우리를 시험할 차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