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니스푼 Aug 28. 2023

그해 여름

오랫동안 기억할 2023년 여름이 간다.

올해 여름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작년 여름에 싱가폴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것만큼의 큰 변화는 아니지만, 드디어 미국생활 정착해서 대문에 못을 쾅쾅 박았다고나 할까.


집을 사서 이사했다. 올 가을에 첫째가 고등학교(9학년), 둘째가 중학교(6학년)를 시작하는 터라 학군을 결정해야 했고, 한 번 정하면 당분간은 바꾸기 어려웠다. 올해도 여전히 부동산 시장이 좋지 않았지만, 어느 새 철이 든 아이들과 보내는 한 해 한 해가 소중한데 어딘가에 임시로 살다가 내년에 또 이사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최소한 4년, 아마도 10년은 한자리에 눌러 살 집을 원했다.



집을 샀으니 가구를 장만해서 집안을 채워야 했다. 오랫동안 아파트 생활을 하다 보니 싱글하우스 사이즈에 맞는 가구가 별로 없어서 모든 물건이 미니어쳐처럼 보였다. 가구며 인테리어에 대해 평소에 관심도 없었고 봐둔 스타일이나 물건도 없었는데, 빠른 시간에 많은 결정을 한꺼번에 하려니 준비 안하고 벼락치기로 공부해서 시험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집을 사면서 큰 돈을 쓰는 김에 가구를 사야 한다. 타이밍을 놓치면 가구가 너무 비싸게 여겨지는 데다가, 없이 사는 것에도 익숙해져서 영영 장만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열심히 고른 책장을 들였다. 내 책을 보관할 책장. 나만의 방을 가진 건 결혼한 후로 처음이다. 파트타임이지만 재택근무를 한다는 이유로 내 방을 따로 장만하게 되었다. 이 방에 편안한 의자와 탁자를 들여놓고 천천히 옛날 책을 다시 읽을 날들이 과연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리고 강아지를 데려왔다. 내가 강아지를 키운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되었다. 역시나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이 원하기도 했지만,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아이들 정서에 좋을 것이라는 내 이유로 강아지를 데려왔다. 우리집에 올 때는 8주짜리 아기였는데, 아직도 3개월이 채 안되었다. 강아지가 어려서인지 우리가 허술해서인지, 배변훈련도 잘 안 되고 강아지가 자꾸 우리 발을 깨물어서 고민이다.


물론 그럴 줄 알았지만,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부담이 무겁다. 다행히 나 혼자의 책임이 아니라 온가족이 나눠 지는 책임이라서 조금 낫다. 강아지가 귀엽긴 하지만 아직은 그리 예쁘고 좋은 줄은 잘 모르겠다. 앞으로는 강아지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겠다. 영영 지금처럼 데면데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린 나이에 어미와 형제들과 떨어져 낯선 인간들에게 자기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강아지에 대한 측은함, 그리고 어쨌든 이 강아지에게는 여기가 자기 집이고 그 또한 이 집의 일원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름 동안 여행도 했고 책도 읽었다. 그 중에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라는 일본 소설을 읽었는데, 너무나 이 계절에 잘 어울려서 앞으로 해마다 여름이면 이 소설을 떠올릴 것 같다. 중년이 되어 회상하는 20대의 어느 여름에 대한 이야기. 주인공 화자는 건축설계사무소의 신입사원인데, 그 여름 동안 건축을 중심으로 해서 건물, 가구, 도구, 음식 등을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만들고 사용하는 것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여름의 색채와 소리, 그 느낌이 견고하면서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겪어보지 않은 그 여름이 그리울 지경이다.



마지막으로 올 여름에 양양에서 서핑 입문 강습을 받았다. 장마철이라 파도가 너무 세서 입문자는 파도를 타지 못하게 했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잔잔한 연습 공간에서 보드 위에 올라서는 것까지만 익혔다. 남은 여름 동안 미국에 와서라도 좀 더 배우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이 여름이 끝나간다. 언제 다시 서핑을 배우고 파도를 탈 수 있는 여름이 올지, 아니 과연 내가 올 여름에 잠시라도 보드 위에 올라갔었는지도 어느새 아득하다. 없었던 일처럼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올 여름 잊지 못할 하나의 느낌을 고른다면 보드 위에 엎드려 눈높이와 수면을 맞추고 비스듬하게 바라보던 바다. 앞으로 십 년 동안 살 집을 정했고, 십오 년은 돌봐야 할 강아지를 들였다. 아이들은 청소년이 되고 입시생이 되어간다. 뿌리를 내리듯이 발밑을 묵직하게 고정하고 집 안에 가구와 물건과 일상을 쌓아가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라도 훌쩍 바다로 달려가 파도를 타고 책을 읽으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내가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