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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의 새빨간 비밀>(2022)

열세 살, 자기 인생을 선택하는 나이

by 허니스푼

여름방학에 중학생 둘째가 원해서 디즈니 플러스 채널에 가입해 주었다. 그 덕분에 간혹 아이가 보는 영화를 같이 보고 있다. 아이가 넷플릭스에서 보는 시리즈들은 공상과학이나 히어로물 등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게 많았는데,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비교적 짧고 건전해서 함께 즐기기에 적당하다.


그 중 한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본다.


<Turning Red> (메이의 새빨간 비밀)


토론토에 사는 13살 중학생 메이는 어느 날 아침 커다란 레드팬다로 변해서 일어났다. 알고보니 메이네 집안 여자들에게는 첫 생리를 시작하면 레드팬다로 변해버리는 저주가 흐르고 있었던 것. 덩치가 크고 털북숭이에 냄새도 나는 레드팬다. 창피해서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팬다는 또 흥분하면 본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난리를 친다. 그런데 이 레드팬다에서 벗어나는 비법 또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했다. 그래서 레드팬다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초경 (그래서 빨간색 레드팬다), 그리고 확장된 두 번째 의미는 사춘기에 겪는 청소년들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마침 메이는 13살 (thirteen - 틴에이지의 시작). 사춘기가 되어 몸이 커지고, 털이 나고, (동양인들에게는 덜하지만) 땀샘이 발달하며 몸에서 냄새도 나기 시작한다. 호르몬이 날뛰어 감정적이 되고 그동안 의지하던 부모님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해진다.


그런데 더 중요한 세 번째 의미. 레드팬다는 청소년기에 싹트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다. 여태까지 메이는 말잘듣는 엄친딸이었지만 레드팬다는 더 이상 엄마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아니다. 레드팬다는 창피하고 숨겨야 하는 집안의 수치, 그리고 더 자리잡기 전에 얼른 싹을 잘라야 할 골칫거리다. 메이의 엄마도 그렇게 자기 안의 레드팬다를 봉인했고, 이모들도 외할머니도 다 그렇게 했다.


그러나 메이는 레드팬다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겠다고 한다. 이런 중대한 인생의 결정을 겨우 13살짜리 아이에게 맡겨도 괜찮을까? 초기에 제압하지 않으면, 점점 힘이 세지는 레드팬다를 엄마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직은, 부모의 힘과 권위로 레드팬다를 억눌러야 한다.


그리하여 엄마와 딸 사이에 한 판 전쟁이 일어난다.

"I'm 13. Deal with it!"


아이를 내 생각에 올바르고 좋은 방식으로 키우느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서 나중에 그게 다 너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그걸 이해해주는 것이 자녀에게는 인생을 건 부담일 수도 있다. 메이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가 바로 그렇다. 메이 엄마는 자신을 향한 자기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차갑고 멀다. 밍(메이 엄마)은 성장기 내내 부모님의 방식대로 얌전하게 자랐지만 모범생 딸노릇도 때가 되면 끝나는 법. 밍이 엄마 눈에 흡족하지 않은 결혼을 하면서 두 사람은 보이지 않게 멀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15살, 12살이다. 어려서부터 통제하며 경쟁 코스에서 앞장서 달리는 아이들로 키우지는 않으려 했는데 그러면서도 내심, 내 자식들이니 때가 되면 자기만의 힘으로 앞장서 달려나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첫째가 먼저 그리고 둘째가 뒤이어 중학생이 되고 보니, 우리 아이들은 아무 것에도 앞장서 달려나갈 마음이 없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이 손글씨를 하도 못 써서 초등 3-4학년 무렵부터 고쳐주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손글씨 교정용 기구를 손가락에 끼워 보기도 했고, 천천히 신경을 쓰면서 글을 쓰라고 받아쓰기랑 시 쓰기도 시켜 봤다.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읽기 쉽게 글씨를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수학문제 답을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한 마디씩 쓴소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일갈.

"I know my handwriting sucks and I'm proud of that!"


그날 이후 아들의 손글씨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직 못 미더워도 열세 살이면 자기 인생을 선택하는 나이. 아이는 손글씨를 잘 쓰는 게 좋다는 내 의견을 이해했지만 그걸 지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거부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멈추고 떠나야 한다. 네 손글씨는 너의 영역, 그건 나의 것이 아니다.


10학년인데 아직도 성적에 진지하지 않은 자녀(=첫째)를 둔 엄마의 정신승리일 수도 있지만, 부모가 어르거나 달래거나 잔소리하거나 야단친다 해서 아이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계속 많은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변하고 새로운 기회도 만나며 성장하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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