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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니스푼 Sep 05. 2024

<메이의 새빨간 비밀>(2022)

열세 살, 자기 인생을 선택하는 나이

여름방학에 중학생 둘째가 원해서 디즈니 플러스 채널에 가입해 주었다. 그 덕분에 간혹 아이가 보는 영화를 같이 보고 있다. 아이가 넷플릭스에서 보는 시리즈들은 공상과학이나 히어로물 등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게 많았는데, 디즈니/픽사의 애니메이션은 비교적 짧고 건전해서 함께 즐기기에 적당하다.


그 중 한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을 정리해 본다.


<Turning Red> (메이의 새빨간 비밀)


토론토에 사는 13살 중학생 메이는 어느 날 아침 커다란 레드팬다로 변해서 일어났다. 알고보니 메이네 집안 여자들에게는 첫 생리를 시작하면 레드팬다로 변해버리는 저주가 흐르고 있었던 것. 덩치가 크고 털북숭이에 냄새도 나는 레드팬다. 창피해서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데, 팬다는 또 흥분하면 본인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온갖 난리를 친다. 그런데 이 레드팬다에서 벗어나는 비법 또한 집안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했다. 그래서 레드팬다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초경 (그래서 빨간색 레드팬다), 그리고 확장된 두 번째 의미는 사춘기에 겪는 청소년들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마침 메이는 13살 (thirteen - 틴에이지의 시작). 사춘기가 되어 몸이 커지고, 털이 나고, (동양인들에게는 덜하지만) 땀샘이 발달하며 몸에서 냄새도 나기 시작한다. 호르몬이 날뛰어 감정적이 되고 그동안 의지하던 부모님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해진다.


그런데 더 중요한 세 번째 의미. 레드팬다는 청소년기에 싹트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다. 여태까지 메이는 말잘듣는 엄친딸이었지만 레드팬다는 더 이상 엄마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아니다. 레드팬다는 창피하고 숨겨야 하는 집안의 수치, 그리고 더 자리잡기 전에 얼른 싹을 잘라야 할 골칫거리다. 메이의 엄마도 그렇게 자기 안의 레드팬다를 봉인했고, 이모들도 외할머니도 다 그렇게 했다.


그러나 메이는 레드팬다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겠다고 한다. 이런 중대한 인생의 결정을 겨우 13살짜리 아이에게 맡겨도 괜찮을까? 초기에 제압하지 않으면, 점점 힘이 세지는 레드팬다를 엄마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하면 아직은, 부모의 힘과 권위로 레드팬다를 억눌러야 한다.


그리하여 엄마와 딸 사이에 한 판 전쟁이 일어난다.

"I'm 13. Deal with it!"


아이를 내 생각에 올바르고 좋은 방식으로 키우느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서 나중에 그게 다 너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그걸 이해해주는 것이 자녀에게는 인생을 건 부담일 수도 있다. 메이 엄마와 할머니의 사이가 바로 그렇다. 메이 엄마는 자신을 향한 자기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차갑고 멀다. 밍(메이 엄마)은 성장기 내내 부모님의 방식대로 얌전하게 자랐지만 모범생 딸노릇도 때가 되면 끝나는 법. 밍이 엄마 눈에 흡족하지 않은 결혼을 하면서 두 사람은 보이지 않게 멀어졌다.


우리 아이들이 15살, 12살이다. 어려서부터 통제하며 경쟁 코스에서 앞장서 달리는 아이들로 키우지는 않으려 했는데 그러면서도 내심, 내 자식들이니 때가 되면 자기만의 힘으로 앞장서 달려나가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첫째가 먼저, 그리고 둘째가 뒤이어 중학생이 되니 우리 아이들은 아무 것에도 앞장서 달려나갈 마음이 없고 훈련도 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이 손글씨를 하도 못 써서 초등 3-4학년 무렵부터 고쳐주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손글씨 교정용 기구를 손가락에 끼워 보기도 했고, 천천히 신경을 쓰면서 글을 쓰라고 받아쓰기랑 시 쓰기도 시켜 봤다. 아무것도 효과가 없었다. 그래도 읽기 쉽게 글씨를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수학문제 답을 알아볼 수 없을 때마다 한 마디씩 쓴소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의 일갈.

"I know my handwriting sucks and I'm proud of that!."


그날 이후 아들의 손글씨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아직 못 미더워도 열세 살이면 자기 인생을 선택하는 나이. 아이는 손글씨를 잘 쓰는 게 좋다는 내 의견을 이해했지만 그걸 지금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기는 거부했다. 그러면 나도 여기서 멈추고 떠나야 한다. 네 손글씨는 너의 영역, 그건 나의 것이 아니다. 


10학년인데 아직도 성적에 진지하지 않은 자녀(=첫째)를 둔 엄마의 정신승리일 수도 있지만, 부모가 어르거나 달래거나 잔소리하거나 야단친다 해서 아이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계속 많은 경험을 하면서 생각이 변하고 새로운 기회도 만나며 성장하게 될 거라고 믿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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