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 홀로 떠있는 배 안에서 사투를 벌이는 늙은 어부가 내가 아니고서야 누구란 말인가. 청새치와 대치를 벌이던 노인은 지쳐갈 무렵 기억을 끄집어낸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좀 더 불어넣기 위해 예전에 카사블랑카의 한 술집에서 몸집이 아주 큰 흑인과 팔씨름했던 일을 떠올렸다. 시엔푸에고스 출신의 그 흑인은 그 부둣가에서 제일 힘이 셌다."(p.72)
서로의 손을 꽉 움켜잡은 채 꼬박 하루 낮과 밤을 맞붙어 있던 두 사람 중 결국 노인이 이겼다. 물론 '당시는 노인이 아니었고 엘 캄페온(승리자라는 뜻) 산티아고라고 불렸'던 때의 일이다. 그 흑인은 여러 차례 다시 도전해 왔지만 산티아고는 쉽게 그를 이길 수 있었다. 흑인이 가진 자신감을 이미 꺾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힘겹게 사투를 벌이다가 이겼던 경험을 떠올려본다. 지쳐가고 있는 내게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샅샅이 뒤져보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더욱 외롭고 더욱 지쳐 쓰러졌던 숱한 밤들이 떠오를 뿐이다. 그때도 참 외로웠는데... 슬펐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는 벅차지도 좋지도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미래에 절망감마저 느끼며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피부에 오슬오슬 소름이 돋으며 아프다. 따뜻한 국화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낫다.
결국은 승리하고 돌아온 노인의 옆에는 상어에게 먹혀 뼈만 남은 청새치가 남았지만 그는 웃었을까. 우리의 삶 끝에 승리가 있을까 패배가 있을까. 승리 속에는 패배가 있을 거고 패배 속엔 작은 승리가 있을 거라는 어렴풋한 미래가 그려지는 건 이미 내가 중후한 중년이기 때문일 거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간이 주는 먹먹한 일말의 슬픔 한 줄기가 온몸에 몸살처럼 퍼져나가는 걸 보면 아직 더 철이 들어야 한다는 신호인 것 같다. 그래서 다행이다. 아직 이렇게 느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혼자 어깨를 감싸 안고 이 차가운 공기 가득한 카페에서 온기를 가둬본다.
나의 청새치를 단단히 붙잡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결국 어디론가 돌아가 노인처럼 누울 수 있기를 기대하며 슬슬 카페를 나선다. 남은 국화차를 따뜻하게 마시고 체온을 올리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