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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Jan 26. 2021

17. 캐릭터를 세상 밖으로 꺼내기

무대 위에서는 혼자가 아니다



연극 연습의 스케줄은 유동적이다. 개인의 일정을 고려해 씬(Scene) 단위나 막 단위로 연습이 진행된다. 처음 대본을 읽은 게 1월 초였고 공연은 3월 초로 예정되어 있어 약 두 달간의 연습시간이 있었다. 방학이라 특별히 할 일이 없던 나는 거의 매일 연습실에 나왔다. 내 캐릭터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빼면 거의 매번 등장하는 데다 모든 파트너와 단독으로 마주치는 장면들도 많았고 연극에 대한 경험도 제일 적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오전에 연습실에 도착해 몸을 가볍게 푼다. 날이 추워 몸이 굳어있는 데다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웜업 시키는 시간이 꼭 필요했다. 특히나 나처럼 뻣뻣하게 굴고 무대 낯을 가리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지금까지도 가장 어렵다 생각하는 부분이 스스로의 연기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거나 잘 보이고 싶을 때 우리는 간혹 목을 가다듬으며 내가 듣기에 가장 좋은 목소리를 일부러 내곤 한다. 그런 게 연기에도 분명히 있다.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다고 의식하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건 정말 보는 사람에게 어색함과 불편함을 준다. 하루아침에 자연스러워지기 어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캐릭터에 대한 분석과 고민이 필요했다. 이 장면에서 그는 왜 이런 말을 할까. 이 장면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움직일까. 이 행동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모든 해답은 대본에 있다는데 가끔을 답을 찾지 못하니 몸이 편하게 그냥 넘어가면 꼭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을 들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다. 내가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의식하지 않았던 나의 습관들이나 버릇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연출가이자 극을 쓴 선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와 그의 세상에 만들어진 ‘우리’에 대해서 말이다. 이 부분에서 참 고마웠던 건 선배는 언제나 내 말에 귀 기울였고 존중해줬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텍스트 속의 우리를 세상 밖으로 꺼내는 작업을 했다. 단편적인 ‘우리’가 조금 더 관객에 공감을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갇힌 생각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살면서 뭐든 혼자 하는 일에 익숙했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언제나 내 몫이었고 그건 전부 혼자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대 위 혼자인 경우는 없었다. 


언제나 상대 역과 눈을 맞추면서 대사를 나눴고 소화했다. 설사 독백을 위해 혼자 남게 되더라도 이 무대 뒤에는 나의 동료 배우들이 있고 앞에는 오롯이 나를 바라봐주는 관객들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살면서 나는 가끔씩 내가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게 당연한 거라 여기며 스스로를 다독거리는데 서툴렀는데 여기, 연습실과 무대 위에서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와 호흡을 맞춘다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러워서 낯간지러운 장면을 연기할 때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곤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은 안 보이고 캐릭터만 보였다. 적어도 연습하는 순간만큼은 ‘우리’였다.


연습을 마치고 저녁을 먹거나 술을 한 잔 할 때에도 주로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은 더 편안하게 내가 느끼는 감정과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에는 어색했던 공기의 흐름이 조금씩 맞아떨어지는 호흡으로 변해갔다.


호흡이란 들숨과 날숨의 결합이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 역시 그러하다. 나의 대사만 주야장천 내뱉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을 정말로 듣고 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대본에 있는 대사를 그대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린 이 부분에서 많은 걸 약속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감정에 취해 예상 밖의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이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즐겼다. 투닥거리는 순간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조차 더 잘 굴러가기 위한 덜컹 거림이라 생각했다.



17. 캐릭터를 세상 밖으로 꺼내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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