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배우의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는 없었다. 특히나 감정선이 고조되는 장면이나 여러 명의 배우가 등장하는 장면의 경우 긴장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다 같이 살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야 했다. 입장료를 내고 오는 관객들에게 언제나 최상의 결과물을 선사하기 위해서 연습을 반복하며 가장 좋은 시너지가 났던 감정들을 머리와 몸으로 기억하려고 애썼다.
배우로서 답답했던 순간 중 하나는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 감정을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할 때였다. 분명히 슬프고 안타깝지만 꾹 참아내면서 참아지지 않는 흘러나오는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내 몸은 미동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정말 미칠 노릇이지.
술을 마시는 장면이 감정적으로 중요했는데 언젠가 한 번 저녁에 술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대사를 맞추며 좋았던 기억이 있었다.
뜨끈한 마룻바닥이 있는 해물찜 집에 앉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사가 시작되면서 즉석 리허설이 이어졌다.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려 해도 도통 기억이 나지 않자 한숨만 뻑뻑 쉬었는데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더라.
그 날은 연습이 뭔가 이상하게도 자꾸만 쳐졌다. 간식을 사러 나간 김에 다 같이 합의 하 소주를 몇 병 사 왔다. 그리고 실제 술을 마시며 연습을 감정 신을 이어갔다.
처음에는 지금의 상황이 재밌기만 했다. 바깥은 아직 환한 오후인데 불을 다 끈 채로 분위기를 잡고 있는 게 마냥 재밌었다. 매번 연습 때마다 물을 따라 종이컵을 부딪쳤을 뿐인데 지금은 유리로 된 소주잔에 진짜 술을 담아 한 잔씩 홀짝였더니 기분이 묘했다. 쨍하는 소리가 들리고 입 안에 들어오는 액체의 쓴맛이 느껴질수록 조금씩 분위기는 달라졌다.
대본대로 대사를 내뱉기보다 지금 이 분위기에 점점 집중이 되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들이 하나둘씩 입 밖으로 나왔다. 머리로만 안쓰럽다 여겼던 감정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씩 밀려 올라왔다. 목구멍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게 느껴지더니 결국 감정이 차올라 터져 버렸다.
그 순간 그 자리에 우리 각자는 없었다.
오로지 ‘우리가 우리에게’라는 작품 속 캐릭터들로 존재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되어 여러 가지 장면들을 맞춰봤다. 평소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들도 알게 된 뜻깊은 시간이었다.
이런 게 몰입이고 집중인가 싶었다. 놀라우면서도 한 편으론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불을 딱 켜는 순간 지금의 공기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잠시 동안의 정적. 다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잊지 않으려 꾹꾹 눌러 마음에 담았다.
그 날은 그렇게 평소보다 연습을 일찍 마치고 자리를 옮겨 술을 본격적으로 마셨다. 일부러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결국엔 공연 이야기였다. 한 팀이라는 끈끈함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까의 이야기. 캐릭터에 빠지는 경험을 처음 해 본 나는 신이 나서 내가 느낀 감정들을 떠들어댔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선배는 내가 지금도 가슴속에 염두에 두고 있는 중요한 말을 해줬다.
“너를 잃어버리지 마”
캐릭터에 대한 몰입과 집중도 좋지만 그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리고 잘할 수 있는 것도 다 단단한 뿌리가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나의 중심을 잃어버리는 순간 캐릭터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이 말은 연기할 때가 아니더라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잊지 않으려는 말이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나의 주인이 되는 것. 그렇게 또 술 한 잔에 인생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