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의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캐릭터에 젖어갔고 눈 감고도 동선과 대사를 무리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기계적인 행동과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로봇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언제나 스스로를 가둔 채 살아온 나는 무대 위에서 ‘우리’가 되어 자유로웠다. ‘우리’가 느끼는 대로 움직이고 말할 수 있었다. 단편적인 단서에서부터 캐릭터 자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했기에 나의 색이 많이 묻어있는 친구였다. 나는 여전히 나였지만 ‘우리’ 역시 조금씩 내가 되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연습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다이어트였다. 캐릭터 특성상 여리여리한 느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연출 선배의 말에 나름대로 혹독한 다이어트를 했다. 프로필 촬영이나 영화 촬영 전 캐릭터에 맡게 다이어트를 한 적은 많았지만 이번에는 무대 위에서 여러 번 관객을 만나야 하는 만큼 장기 프로젝트였다. 공연을 2주 정도 앞두고 식단 관리에 들어갔는데 내 생애 가장 힘든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점심으로 다들 중국 요리를 시켜먹을 때 혼자 두부 샐러드를 먹었고 간혹 저녁에 술자리에 갈 때면 생오이 두 조각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곤 했다. 앞에 치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만큼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싶었고 관객에게도 가장 베스트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체중이 빠진 만큼의 드라마틱한 외형의 변화는 없었다. 힘이 없어 동정과 연민이 느껴졌다는 말은 몇 번 들었으니까 그거면 된 거다.
이제는 연습실이 아닌 극장에 들어가 본격적인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아직 무대가 꾸려지기 전이었지만 등퇴장로가 생긴만큼 동선부터 점검했다. 그리고 암전 상태에서의 적응도 이뤄졌다. 혹여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들은 수정되었다. 동선이 꼬인다거나 암전 상태에서 전환이 어렵다거나 하는 장면들은 덜어내거나 추가해 보완했다. 무대가 만들어질수록 쾨쾨한 공기가 가득했던 극장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이제는 극장에 모여 무대 청소를 하고 몸을 풀고 연습을 진행했다. 하루가 지나 공연 날짜가 다가올수록 내 심장소리도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창작극이었기 때문에 홍보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톱스타가 출연하는 작품도 아니고 대학로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작은 공연이었다. 게다가 오픈런으로 상연되는 작품도 아닌 데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단 6회의 공연만 예정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티켓으로 인한 수입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새로운 극단의 시작을 알리는 취지의 공연이었고 모든 제작비는 연출 선배 몫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노 개런티로 오로지 연극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이 공연을 이끌어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와 스텝의 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많은 관객 분들이 사전 예매를 해주셨고 결국 관객석 맨 앞줄에 방석을 놓아 좌식 좌석을 운영할 정도로 모든 공연은 매진되었다.
더 잘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이전에도 그때 당시에도 나는 연극영화과 학생이었지만 딱히 친구들에게 무대 위의 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대극장 뮤지컬에 몇 명을 초대하긴 했지만 작품 자체의 스케일이 워낙 큰 데다 수많은 배우 중 하나였기 때문에 친구들은 숨은 그림 찾기로 나를 발견하기 바빴다.
이번은 달랐다. 다섯 명의 배우가 작은 무대를 꽉 채우는 작품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무대에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우리’를 표현해내며 나의 눈빛, 손짓, 행동 하나하나 그리고 호흡까지 그대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설렘과 긴장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음이 널을 뛰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 잡을 수 있었던 건 나는 결코 무대 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 배우들과 스텝, 그리고 나를 믿고 내 꿈의 순간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 와 준 관객들이 있었기에 나는 흔들리지 않고 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