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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썰양 Dec 23. 2015

당신의 동료가 1년마다 바뀐다면?

국세공무원의 인사이동에 대한 단상


꼬꼬마 시절 매년 12월에는 거리마다 캐롤이 울려 퍼졌고 크리스마스 트리와 전구 장식이 집집마다 가게마다 가득했다. 유사 이래에 경기가 좋다고 말한 적은 별로 없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어렵다고 말하던 그 시절조차 지금보다는 나았던 것 같다. 지금은 백화점이나 커피숍에나 가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뿐 그 어디에서도 예전의 풍요롭던 연말 기분을 느낄 수가 없다.

12월 25일은... 그냥 빨간 날 중의 하나인 겁니다

그래도 세무서는 연말이 되면 살짝 들뜬다. 연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성과평가 마감이 11월 말이라 어지간한 업무는 마무리가 되었고, 12월은 종합부동산세 빼고는 특별한 이슈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정기 인사이동이 성큼 다가왔기 때문이다.


국세공무원의 정기 인사이동


국세공무원은 2년에 한번씩 세무서를 옮긴다. 대부분의 사기업과 지점이 많지 않은 공기업들은 한번 입사하면 퇴사하지 않는 이상 부서를 옮기거나 업무를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꼴통같은 상사나 4차원 동료를 만나면 본인이 회사를 그만두거나 상대를 괴롭혀서 퇴사하게 만들지 않고서는 기약없이 참아야 한다. 하지만 국세공무원은 2년마다 세무서를 옮기기 때문에 운 좋으면 1년, 운 나쁘면 2년만 참으면 된다. 이게 다른 직렬 공무원이나 회사원에 비해 상당한 장점이라고 하겠다.


국세청은 산하에 6개 지방국세청과 전국 114개 세무서를 두고 있다. 인사이동은 현재 소속된 지방청 내의 세무서 중에서 하게 되고, 다른 지방청 소속 세무서로 가려면 신청 기간에 별도로 신청을 해야 한다. 원한다고 다 들어주는 건 아니지만 이론 상으로는 2년에 한번씩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으며 근무를 할 수도 있다.


서울 지역에는 26개 세무서가 있다. 이 중에서 4개 세무서를 지원하면 최대한 희망사항을 반영하여 뺑뺑이로 발령을 낸다. 서울청의 경우 강남쪽이나 시내에 있는 세무서를 선호하는데, 아무래도 민원의 세기와 경제적 수준이 비례하기 때문이다. 잘 사는 동네는 세무대리인을 고용해서 세무 업무를 처리하는 편이기 때문에 말 안통하는 민원인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하다. 노련한 반장님들은 가고 싶은 세무서에 어떤 자리가 비는지 파악하고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서장님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내년 정기 인사이동은 1월 15일로 예정되어 있어서 요즘은 모든 화제와 관심사가 '다음 근무지'이다.

어디로 갈까 그것이 고민

신규직원은 특별히 순환보직 대상이 되어 1년에 한번씩 부서를 옮기고 2년에 1번 세무서를 옮기게 된다. 개인납세 - 법인 또는 재산 - 조사 - 납세자보호 분야를 한번씩은 경험할 수 있어서 세무 전문가로서 성장하는 밑거름을 마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징계성 인사이동도 있는데 음주운전을 했다든지 사고를 친 직원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세무서로 발령이 난다. 옛날에는 필수 자격증을 따지 못한 직원은 서울에서 강원도로 멀리 인사이동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또한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얘기라 요즘은 강원도에 있는 세무서를 되려 선호해서 아무나 못간다고 한다.


2년에 한번씩 이동해서 좋은 점들


1. 분위기 쇄신

인사이동의 가장 큰 장점으로 '리프레쉬'를 꼽고 싶다. 세무 행정이 1년을 주기로 똑같이 반복되기 때문에 한 곳에서 계속 근무를 하게 되면 지겹기도 하고, 시급하지 않은 업무들은 계속 미결로 남게 된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2년마다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에 떠나기 전에 쌓아둔 서류들도 정리해서 파쇄할 건 파쇄하고 보관할 것들은 후임자가 보기 쉽게 묶어 두어야 한다. 인수인계서도 작성하고 컴퓨터에 쌓아둔 파일들도 지울 건 지우고 찾기 쉽게 정리한다. 이삿짐을 최소화하기 위해 필요없는 물품도 남은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신변을 정리하면 마음도 가벼워진다.


근무 환경이 바뀌면 마음가짐도 새로워진다. 물론 담당하는 구역만 바뀌었을 뿐 같은 시스템으로 같은 업무를 하지만 출근길도 달라지고 동료도 달라지고 매일 가는 식당도 달라진다. 사소하지만 큰 변화다.


2. 성장의 기회

신규직원은 3년까지는 순환보직 대상이 되어 매년 다른 업무를 하게 되지만 그 이후에는 2년마다 세무서를 옮길때 부서를 바꿀 기회가 생긴다. 세무서에는 개인납세과, 법인세과, 재산세과, 조사과, 납세자보호담당관실, 운영지원과가 있는데, 하는 일이 다 달라서 부서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업무를 배울 수 있다. 대개는 법인세과와 재산세과를 선호하고 개인납세과는 기피하는데 원하는대로 부서 배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든 배울 게 있고 그게 오롯이 자기 재산이 되고 실력이 되기 때문에 비선호부서에 배치되었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경력이 좀 쌓이면 지방청이나 본청 근무를 지원해볼 수도 있다. 본청은 세목별로 각종 기획점검을 계획하고 업무지침을 마련하여 지방청에 시달하고 결과를 점검한다. 지방청에서는 세무서에서 담당하는 기업보다 큰 규모의 기업들을 조사하고 역외탈세를 조사하는데, 이런 업무들을 담당하면서 세무전문가로서의 커리어를 쌓으면 훗날 고액연봉을 받으며 세무법인에 스카우트될 수도 있고 세무사 자격증을 따서 개업을 할 수도 있다. 본인이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만큼 성장할 수 있는 곳이라는 점도 국세청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3. 진상과의 이별

- 말도 안되는 본인만의 철학을 내세워 결재를 안해주는 관리자

- 고등학생 자식이 있는 나이많은 직원 조차도 다른 직원들 보는 곳에서 1시간씩 혼을 내는 인신공격형 관리자

- 무능한건지 고의인지 모르겠지만 공통업무를 불공평하게 분배해서 열받게 하는 동료

- 꼬랑내와 담배냄새로 숨못쉬게 하는 옆 직원


이런 캐릭터는 어느 회사에나 있기 마련이다. 사기업에서는 피할 방법이 없지만 세무서에서는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만 견디면 헤어질 수 있다. 물론 옮겨 다니는 세무서가 다들 고만고만해서 몇년 후에 또 만날 수도 있지만 이별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진상을 견뎌낼 힘이 생기는 것 같다. 지방은 세무서간 거리가 멀어서 선택할 수 있는 세무서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근무한 직원과 또 만날 확률이 높아서 서로 잘해준다고도 한다.


아울러 인사이동은 2년간 나를 괴롭힌 진상 민원인과의 이별이기도 하다. 물론 세상은 넓고 진상은 많으니 새로 이동할 세무서에도 대책없는 진상 민원인이 없을리 만무하지만, 혹시 나와는 궁합이 잘 맞아서 의외로 순한 양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희망을 품으며 지금의 진상을 견뎌낼 수 있는 것 같다.

안녕, 진상...

4. 인맥확장

우리 과 직원은 25명이다. 이 중에 7명이 다른 세무서 혹은 다른 과로 이동할 예정이다. 1-2년마다 25명을 새로 만나 근무하다보면 아는 사람이 많아진다. 개인 성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모임을 좋아하는 활달한 분들은 같이 근무한 팀끼리 모임을 매년 만들어 정기적으로 만나다보니 연말에 송년모임만 몇 십개가 된다고도 한다. 인맥이 넓어지면 챙겨야 할 경조사도 그만큼 많지만 정보도 많이 얻고 아쉬운 소리도 할 수 있으니 그또한 재산이라 하겠다.


인사이동의 단점


언제부터 인사이동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추측건대 납세자와의 유착을 방지하기 위해서 2년 주기 인사이동을 도입했을 것이고, 대개는 국세공무원이 된 이상 정기 인사이동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인사이동의 단점은 크게 와닿지 않는다.


다만 지방의 경우 세무서마다 거리가 멀어서 출퇴근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다고 2년마다 아이들 학교까지 전학시켜가며 이사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인사이동시기가 되면 고민이 많아진다고 한다.


아울러 본인이 원하는 세무서, 원하는 부서에 100% 배치받는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원치않은 곳에 발령을 받고 불만스러워하는 직원도 더러 있다. 혹자는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어 빽을 동원해서 좋은 세무서 좋은 과에 배치받으려고 용을 쓴다고도 하는데 공사가 다망하신 높은 양반들께 세무서 옮겨달라고 매번 아쉬운 소리를 해대는 것도 우스운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만남의 기쁨도 헤어짐의 슬픔도


해마다 겪는 인사이동이지만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다. 아홉번의 이별과 만남을 반복했지만 번번히 마음엔 한동안 소용돌이가 친다. 함께 하기 괴로운 사람이었어도 헤어질 때에는 뭔가 짠한 마음이 들고, 같은 세무서에 다른 과로 이동하는 것뿐이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식사도 함께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



연말은 또한 명예퇴직의 시기이기도 하다. 후임을 위해서 정년보다 1-2년 일찍 물러나는 분들도 계시고, 고위공무원은 그보다 더 일찍 조직을 떠나기도 한다. 청춘을 바쳤고 가족을 희생해가며 오른 자리였는데 때가 되면 조용히 내려와야 한다. 남은 자들의 송별의 박수를 뒤로 하고 걸어나가는 그분들의 뒷모습이 쓸쓸하다. 몇 십년을 충성했지만 영원히 내것은 아니다. 지금, 여기, 내 자리도 그저 잠깐 머물다가 떠나는 곳일 뿐이다.


그러니 떠날 때 미련이 남지 않게,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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