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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UE Aug 06. 2021

나의 두 번째 할머니

교동 할머니


초등학교 때, 할머니의 시골집에서 차를 타고 5 분쯤, 어린이 걸음으로 걸어가면 30분쯤 걸리는 거리에 친척 할머니의 집이 있었다.

할머니의 친오빠 부부가 사시는 집으로, 식구들은 항상 교동 할머니, 교동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우리 할머니는 츤데레처럼 화내시며 나를 이뻐하시고 걱정하시는 반면, 교동 할머니는 항상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날 예뻐해 주셨다.

그래서 난 교동 할머니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난 주말에 심심할 때면 종종 교동 할머니 댁으로 혼자서 놀러 갔는데, 우리 할머니께는 "할무니! 교동할무니집 갔다오께!" 하고 바로 집을 나선다.



시멘트길 깔린 넓은 논길을 지나 작은 시냇물을 한번, 큰 다리를 두 번 건너면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지금이야 남의 집에 말도 없이 가면 상대방이 불편해하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대문은 항상 열려있었고, 담장은 낮았다.

말없이 불쑥 드나들어서 할머니가 계시면 나를 보고 놀라움과 반가움을 한 번에 내비치시기도 하고, 어쩔 땐 안 계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아무 거리낌 없이 할머니 댁 마루에 앉아서 기다렸다.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할머니가 오시면, 항상 미안해하시며 시장 다녀왔다거나 밭에 갔다 오셨다거나 하는 말씀을 하셨는데, 난 기다려도 할머니를 만난다는 것이 좋았다.

교동 할머니 댁은 항상 동물이 많았다.

개와 고양이는 물론, 염소와 커다란 소가 두세 마리쯤은 항상 있었다.

그 소들은 항상 두 마리였는데, 가끔 송아지를 낳아 세 마리가 되기도 했다.

난 그 소들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했다.

멀리서 보면 몰랐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얼굴은 내 덩치만 하고 눈동자는 내 얼굴만큼 아주 컸기 때문이다.

어린애 눈엔 그게 무서워 보였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착한 애들이었다.

그 애들은 어린이였던 날 신기해했고, 혓바닥을 내밀며 핥아보려 했다. 그러더니 곧 흥미를 잃고 바닥에 눕거나 밥을 먹었다.

교동 할아버지는 가마솥에 짚이나 여러 무언가를 넣고 누런 소죽을 끓이시고는 그늘에 식혔다가 소들에게 먹이셨다.

교동 할아버지 부부는 정말 옛날 시골 풍경 안에서 그대로 살고 계셨다.

교동 할머니는 야리야리하고 상냥한, 나긋나긋한 성격이셨다. 그리고 쉬는 일이 없으셨다.

집안일도 하시고, 강아지나 고양이 염소 밥도 챙기시고 집 앞 텃밭에 풀도 뽑으시고 나 밥도 챙겨주시고 바쁘게 사셨다.

가끔가다가 우리 할머니가 광주시내에 병원을 가신다거나, 놀러 가신다거나 해서 하룻밤이라도 집을 비우시면 한동네에 수많은 친구들 집이며, 바로 옆집의 친척집을 놔두고 항상 교동 할머니 댁에 날 맡기셨다.

그곳의 마당은 항상 가득 차있었다.

수많은 항아리들, 소 외양간, 강아지 집, 염소 외양간, 가끔 가면 토끼도 있을 때도 있고 고양이는 마당 아무데서나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할머니의 상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할머니 댁엔 고양이들이 자주 바뀌었는데 그때마다 "할무니, 고양이 다 할무니 거예요?"

"아니여~우리 집 고양이 아녀~ 어디서 막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막 그려"

할머니는 고양이를 딱히 키우시는 건 아니었고, 오는 아이 안 쫓아내고 가는 아이 안 잡으셨던 것뿐이었다.

교동 할머니는 현재까지도 나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나이쯤 되니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들 나이 드셔서 이제 부고를 접하고 할머니께서 가시는 일이 많아졌다.

지난번 어느 친척의 장례식에 할머니께서 가셨고, 할머니는 교동 할머니와 만나셔서 통화연결을 해주셨다.

교동 할머니는 아직 나를 기억해 주셨지만, 귀가 잘 안 들리셔서 대화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릴 적 나를 사랑해주시던 교동 할머니도 점점 나이 들어가시는구나..

언젠가 한 번은 꼭 다시 가고 싶은 곳, 꼭 다시 뵙고 싶은 분.

코로나가 얼른 끝나야 뵈러 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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