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목소리로 듣다

by 사탕볼

일평생 시력이 안 좋아서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선명히 보이지 않는 슬픈 눈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만 잘 안 보이는 거지 그래도 봐야 할 건 다 보이고 사는데 지장 없다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가끔 눈을 너무 열심히 쓴 날 밤에 불을 끄면 한쪽 눈을 손으로 가린 것처럼 한 눈이 아예 안 보이는 지경이 되는 날에는 이러다 아주 안 보이면 어쩌나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은 가끔 그런 날이 문제가 아니다. (내 눈에 대해 아니 내 몸뚱이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소설 한 권 나오니 언젠가 쓰게 되겠지.)

생각지 못한 복병이 찾아온 것이다.

노안......

나는 고상한 취미의 대명사인 독서를 하나도 안 고상하게 즐긴다.

사춘기 시절 나를 독서의 길로 이끈 할리퀸 시리즈부터 책 읽고 있으면 공부하라 소리를 안 하던 부모님 덕분에 입문한 장편대하소설들까지.

난 일찍이 장르를 가리지 않고 활자화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학창 시절 소설 '남자의 향기'를 수업시간에 몰래 읽다가 엉엉 우는 바람에 선생님께 걸리는 슬픈 에피소드도 가진 책 좋아하는 나.

나의 절친 착한 돌이 소개해 준 웹소설의 세계에도 한때 빠졌으나 눈이 아파서 어지간히 치명적이지 않으면 읽기 힘들었다. 나에게 노안은 나의 행복했던 취미생활을 한순간에 일처럼 만들어버렸다. 나와 일언반구 상의도 없이....

그렇지만 언제나 죽으란 법은 없는 법. 새로운 대안인 오디오북을 알게 되었다.


합성음성으로 읽어주는 오디오북은 영 거북한데 사람이 읽어주는 책은 참 좋다. 오디오북에 맛이 들려 이 책 저 책 듣다가 드디어 나의 잠자리를 책임지는 책을 찾았다.

[정우성이 읽는 조지 오웰의 코끼리를 쏘다]

오 마이갓!

난 남자의 외모를 1번으로 따지는 사람이다. 외모를 판별하는 눈은 매우 발달해 있다. 일단 잘 생기고 거기에 목소리까지 좋아야 된다. 나의 그 어려운 조건을 다 갖춘 사람은 TV에만 나온다.

정우성이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옆에서 읽어준다면....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이거지.


"나 오늘 레 미제라블에 장발장이 코제트를 찾아서 데리고 오는 부분부터 듣고 싶은데... 장발장은 이병헌, 페나르디에 부인은 전미도, 코제트는..... 요즘 목소리 좋고 발음 좋은 신인 있으면 한 사람 추천해 주세요. 다른 역할은 알아서.... 9시부터 50분 정도 듣고... 그 뒤에 요가라고요? 아... 그럼 10시엔 요가할 거니까 준비해 줘요."

시간이 되어 난 리클라이너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사운드의 반사와 잔향시간을 철저히 계산하여 목소리가 가장 잘 전달되도록 특수 설계된 응접실에 나의 독서 동아리 친구들이 모여 책을 읽어준다.

이병헌의 목소리로

"네 이름이 코제트니? 이 물통을 들고 어디까지 가는 거지?"

전미도의 목소리로

"코제트를 내어 줄 수 없어요. 정히 데려가시겠다면 삼천 프랑을 더 내놓으세요."

한참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난 요가 준비가 된 요가실로 간다.

요가실로 가며 비서에게

"내일은 정우성 씨한테 연락 부탁해요. 할리퀸 문고 [기간제 왕비]를 듣고 싶다고 전해주세요."


노안으로 책을 오래 읽기 어렵다고 이런 상상을 하는 나.

난 이런 내가 참 좋다.


빈 살만 씨. 나 매력 터지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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