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둘째를 낳고 나서 육아휴직을 하고 키우다가 아이가 두 돌이 되기 전에 이른 복직을 했다. 둘째를 갖기 전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터라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전휴직까지 써서 이제 남은 휴직은자율연수휴직뿐이었다. 남편의 직장 이동 및 이사 등 여러 여건상 그때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복직을 했다.어린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하는 미안함은 가시지 않았지만 아이들도 잘 적응해 주길 바라며 지하철을 타고 먼 거리를 출근하는 고달픈 워킹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한참 코로나가 심할 때여서 처음에는 온라인 수업으로 학생들과 만났고 그러다가 나중에 마스크를 쓰고 등교수업이 진행되었다. 학기 중간 복직이었지만 담임으로 중간 복직을 하였다. 몇 년간 육휴를 하고 돌아온 학교는 어색했지만 가르치는 걸 좋아했던 나는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였고, 아이들이 재밌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교재 연구를 하며 즐거웠다.
하지만 가르침이 교사의 주된 업무가 아니었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다툼으로 인한 학부모 민원 연락이 시작되었다. 학교라는 곳은 코로나 시국이라 그런지 모두 더 예민했고, 아이들의 다툼에서 내 아이의 말만 옳고 다른 아이의 잘잘못이 더 크다고 따지는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다툰 것은 교사가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탓이라는 말도 들었다.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학생들의 다툼에 관한 학부모 민원 전화를 받고 상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민원이 나왔다. 그리고 오전에 수업 전에 받은 언제 통화 가능하냐는 학부모의 문자를 받고 힘들던 어느 날 나는 생각했다. 이제 그만둬야겠다.
동네에서 알게 된 아이 학부모들과 얘기하다가 얘기 끝에 예전에 교사였었다고 말하면 다들 이렇게 얘기한다.
“그 아까운 직업을 왜 그만두셨어요?”
그럼 나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까운 직업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때가 생각나 문득 생각에 잠긴다. 몇 달 동안 불안 증상으로 심리상담을 받고 많이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상처가 덜 아물었나 보다. 15년 차에 그만두겠다는 내게 관리자는 나같이 중간에 이렇게 일찍 그만둔 사람은 처음 본다고, 이런 사례가 없다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사실 나는 10년 차 경력 이상이 쓸 수 있는 자율연수휴직이 1년 남아있었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만두었다. 1년 뒤에 내 선택도 변함이 없을 거 같아서였다. 내가 의원면직하고 몇 달이 지난 이후에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선생님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나왔다. 남편에게 말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관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 생각이 날까? 남편은 그의 성격답게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그 다운 무심한 대답이 오히려 약간은 위로가 되었다.
의원면직.. 교직을 중간에 본인의 요청에 의해서 그만두는 것이 완전히 수리가 되고 나는 교사 신분에서 벗어나 그냥 전업주부가 되었다. 며칠 뒤 나는 그림을 배우러 갔다. 오일파스텔로 꽃을 그렸고 유화로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렸다. 작가들의 각종 북토크를 신청해서 들으러 갔고, 자주 책을 읽었다. 학부모 합창단에 들어가 노래를 배웠고 사람들과 함께 어르신들께 어버이날 경로잔치 합창 공연 봉사도 했다. 학교를 나오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배울게 뭐가 있을까 싶었는데 배움을 시작하니 이 세상엔 배워야 할 것이 배우고 싶은 게 정말 많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배우기만 하는 사람에서 머물기 싫고 그 배움이 돈을 버는 것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면 그런 바람이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