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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미 Mar 10. 2024

보리밥

건강식에도 후유증이

보리밥을 먹으러 갔다. 드라이브 삼아 변두리를 달려 보리밥 전문식당을 갔다. 식탁 위에는 보리밥과 더불어서 초록과 노랑 하얀과 갈색 흰색이 어우러지는 오색나물이 올라오고 된장찌개와 돼지고기볶음이 함께 올라와 온갖 영양소가 다 모여있는 듯하다.  


오래전에 보릿고개란 말이 있었다. 봄이 지나 보리가 익어 보리밥이 상에 오르기 전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가물가물하는 어린 시절을 떠 올려보면 가을 추수가 끝나고 겨울 동안은 하얀 쌀밥을 먹었다. 콩이나 팥이 섞인, 조나 수수가 섞인 잡곡밥도 먹었지만 그래도 겨울철에는 부드러운 쌀밥을 먹었다. 그러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상 위에는 보리밥이 올라온다. 보리밥은 입안에서 보리살이 혼자 미끈거리며 잘 씹히지 않아 싫어했다. 그러나  보리밥을 짓는 엄마의 수고는 배가 된다. 보리쌀이 잘 익지 않으니 작은 무쇠솥에 푹 삶아 대나무 소쿠리에 건져 놓았다가 먹을 만큼 덜어 꽁당보리밥 위에 쌀을 조금 얹어 밥을 지었다. 그나마 위에 올라와 있는 부드러운 식감의 쌀밥은 살살 걷어  아버지와 남동생의 상에 올랐으니 더 먹기 싫었던 꽁당보리밥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통일벼의 등장으로 밥맛은 떨어져도 쌀이 여유 있어지면서 쌀밥을 먹을 수 있는 기간이 길어졌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혼식장려 정책까지 등장했다. 쌀을 아끼고 잡곡밥을 해 먹으라는 정부의 지시였다. 점심시간이면 선생님이 교실을 돌며 도시락 검사를 했다. 쌀밥을 도시락으로 싸 오면 벌을 받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면, 우리 아이들이 믿기나 할까? 농촌에 살아 잡곡이 흔했던 나는 콩밥도 자주 먹었고 수수나 좁살을 넣은 잡곡밥을 도시락으로 가져갔다. 난 그게 싫었다. 도시락 검사를 하면 친구들은 거의가 보리밥 도시락인데 나는 잡곡밥 도시락이었다. 나도 보리밥 도시락을 싸 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잡곡밥도 좋은 도시락이었는데 보리밥이 아니라 선생님한테 혼 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혼났었는지 그냥 지나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혼나지는 않았겠지. 보리밥 장려가 아니라 혼식 장려이니 잡곡밥은 좋은 도시락이었을 테니까.


부드럽고 씹으면 달착지근해지는 쌀밥만 좋아하던 내가 이제는 밥을 지을 때 한 줌의 보리쌀을 넣는다. 물론 가공이 된 보리살이고 예전보다 솥의 기능이 좋아져 일부러 보리를 쌈지 않아도 맛있는 밥이 된다.  지금은 쌀이 섞인 보리밥이 좋다. 꽁당 보리밥은 그 식감이 쌀밥 같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다. 요즈음은 보리밥 식당을 일부러 찾아간다. 물론 보리밥 전문점의 식탁 위에는 여러 종류의 나물이 올라오고 고기도 곁들여 영양만점의 별식스런 식탁을 손님에게 제공하면서도 값이 비싸지 않아서 좋다. 그야말로 건강식단이다.  


저녁, 텔레비전을 보고 앉아 있는데 방귀가 나온다. 왜 방귀가 자꾸 나오지?  위염을 달고 사는 사람인지라 방귀가 나오고 냄새까지 나니 은근히 걱정이 되어서 오늘 뭘 먹었나? 생각했다. 그랬다. 보리밥을 먹었던 거다. 보리밥 한 대접에 여러 종류의 나물을 넣고 시래기 된장찌개와 제육볶음과 코다리구이로 내가 볼록 나오게 먹었던 거다. 그만큼 맛있었다. 어린시절 거부하던 꽁당보리밥이 아니라 별식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배부르게 먹었던 보리밥 정식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삶도 달라지면서 예전의 것을 그리워하며 찾아간 보리밥 식당.  예전보다 호화로운 식탁에 앉아 욕심껏 먹은 한 끼의 후유증으로 방귀가 잦은 저녁이다. 생리 현상임에도 부끄러웠던 방귀. 그러나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속 시원함을 위해 방귀도 참지 않는 뻔뻔스러운 여자가 되었다. 세상이 발전해서 먹을거리만 변한 게 아니다.  작은 쌀알같이 반짝이던 내 마음이 이제는 무쇠솥에 삶아낸 꽁당보리밥의 흩어진 알갱이처럼 푸석한 어른으로 변해버렸다. 다소곳함을 버리고 뻔뻔해지는 속 시원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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