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순미 Apr 26. 2024

건망증

기차를 타고 서울을 가고 있었다. 문득, 지갑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밤에 핸드백에 작은 지갑을 넣었는데 아침에 마음이 변해 커다란 에코백을 들고 나왔다, 나오기 전에 핸드백에 준비되어 있던 약이랑 화장품 몇 개와 충전기까지 꼼꼼하게 옮긴다고 했지만, 핸드백 옆주머니에 넣은 지갑을 챙기지 않았던 거다. 스마폰에 끼워져 있는 카드로 일반적인 결제가 다 이루어지니까 현금이 없다고 일상이 불편하지 않다. 집을 떠났어도 돈이 없어 불안하지도 않다.  다시 지난해 받은 지하철카드가 지갑 속에 있다는 생각이 났다. 지하철 요금이 큰돈은 아니지만 요금을 지불 하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소소한 일에 마음을 다치듯이 소소한 푼돈이 아깝기만 하다. 지갑을 챙기지 않은 것도 건망증의 일부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외출 준비를 해도 이렇게 구멍이 생긴다.  


남편과 두 시에 만나기로 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 기차를 탄 건 서울에 가서 남대문시장 구경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서다. 그런데 재래시장에 가도 되나? 돈이 한 푼도 없는데. 현장에서 계좌이체를 해 주면 되지만 돋보기를 쓰고 이체를 해 주어야 하니  그 또한 귀찮은 일이다.  


여고동창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창 시절에는 짝으로 앉아 공부를 했지만 오랜 세월 각자의 삶을 살며 영락없이 모르고 지내다가,  한동안은 자주 연락을 했었지만 다시 소식이 뜸해진 여고동창이다. 문득 내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단다. 오랜만이어도 이름 석자가 반가우니 한동안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나이 들면서 수다만 늘었나 봐 우리. 까르르 웃으며 전화기 속으로 이야기가 계속된다.

"나, 재래시장 가는데 돈이 없어. ㅋㅋㅋㅋ~`"

"어머 어떡하니? 재래시장은 현금 있어야 하는데? 너 어디야?"

"이제 남대문시장 다왔어. 서울역 부근에서 남편 만나기로 했어."

"그러니? 내가 지금 나가도 한 시간 넘게 걸리는데?"

돈 없는 나를 위해 나올까? 망설이는 친구가 고맙지만 나오지 마라 했다.  


지갑 없이 남대문 시장을 서성이는 이야기를 하다가 그녀의 하소연을 듣는다. 어느 날 핸드폰을 찾는데 도대체 어디다 두었는지 알 수가 없더란다. 집안을 뒤지며 돌아다녔다.

"난 정말 왜 이러지? 건망증이 너무 심하잖아. 도대체 전화기를 어디다 두었는지 모르겠어. 내가 정말 답답해."

"어머, 너도 그러니? 나도 그래."

"우리, 치매 검사 해 봐야 되는 거  아냐? 건망증이 심해도 너무 심해 걱정이야."

이런 말을 주고받은 건 친구와 내가 아니라,  친구와 통화를 하는 그녀와 그녀 친구의 대화였다란다.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면서, 한 손으로는 이리저리 온 집안을 뒤지고 다녀도 도대체 전화기가 보이지 않더라는 그녀의 고백이다.  한참을 웃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으니 눈으로 보이지 않는 휴대전화. 그런 말을 들으며 통화를 하는 그녀의 친구도 전화기를 들고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둘은 없어진 전화기와 심한 건망증 증세에 대해 걱정하며 한참이나 통화를 했더란다.  


나이가 든다는 게 뭔지. 추억은 많아져 아름다운 기억도 많지만 점점 불편함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저 웃어 넘기기도 애매한 일들도 많아진다. 그래도 그냥 웃어버려야 함을 알지만 그런 일들로 인해 내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릴까 봐 걱정이 되고 무서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들고 나올 가방정리도 신경써서 했고, 집을 나설 때 전기코드를 세밀하게 살피고, 문단속도 내가 정해 놓은 규칙에 따라  확인하며 집을 나서지만 지갑을 놓고 오는 실수를 저지른다.  완벽이 없다. 친구와 전화 속 이야기로 웃음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지만 , 알 수 없는 내일이 걱정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마워, 라는 한 마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