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전 홍천에 다녀왔다. 예정에 없던 일인데 아침에 남편이 갑자기 홍천에 가자고 했다. 내 시간표에는 없던 일정이라 서둘러 준비를 했다. 홍천에서 열리는 산나물축제장에서 점심을 먹고 지역 예술인들의 공연을 봤다. 비슷비슷한 지역 축제장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수타서에 가자고 했다.
홍천 수타사를 다녀간 건, 6,7년은 된 것 같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일 수도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꽃이 피는 시기여서 걷기도 좋고 주변 풍경이 예뻐서 수타사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몸은 늘 피곤한지라 어디를 간다는 게 늘 부담스럽게 살고 있지만 수타사 정도는 둘러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들린 곳이다. 아니 사실은 방문하고 싶던 곳이다. 지난해 이맘때도 남편에게 홍천 가자는 말을 했으나 거절당했고, 친구들에게도 수타사 숲이 좋으니 함께 방문하자고 이야기했던 적도 있다. 가끔 그런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수타사에 가고 싶은 마음이 많았던 것 같다. 수타사 주변 숲은 그만큼 휴식하기 좋고 등산의 부담도 없는 숲이다. 내 기억에.
남편이 숲길을 걷는 사이 혼자 수타사를 살짝 들여다보고 주변 숲길로 갔다. 조팝나무와 철쭉의 꽃은 이미 졌다. 아니 느긋한 성격을 가진 철쭉 옃 송이가 조금 남아 있기는 했다. 철죽과 비슷만 영산홍은 아직 피어 있다, 정원처럼 인공의 꽃밭으로 이루이진 숲이다. 다음 달엔 예쁜 꽃을 피울 수국길도 있다.
- 다음 달에 도시락 싸서 오자. 수국 보러.
남편과 있을 때는 말이 적은 나지만 이렇게 다음 달의 나들이를 미리 약속해 본다. 그러나 그날로부터 이미 한 달이나 지났다. 수국의 계절도 다 지나갈 때까지 어쩌면 올해 수타사는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요즘의 나는 사람들과 만나면 말이 많이 진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지지만 집에서는 말이 없다. 그저 소심하게 따라쟁이가 되어 내 주장을 접는다. 가족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요구도 하지 않는다.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 사람의 생각은 늘 자기중심적이다. 그렇기에 내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건 순전히 내 생각이겠지만 대체로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집에서는 평생을 가족을 도우며 보조자로서 살아온 나다. 밖에 나가면 그래도 나를 나로 인정받는다. 그러다 보니 당당하게 평등한 입장에서 말이 많이 지는데 가족들에게는 입이 붙는다. 집에서는 일하고 누워 자고 간간히 책 보고 블로그랑 놀고 하는 게 일과다. 말을 잃는다. 포기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나를 내세우기는 일을 포기한 거다. 그래서 집에서는 말이 없나 보다.
산에서도 말이 없이 걷는다. 꽃이 예쁘고 초록으로 피어오르는 나무들이 예쁘니 사진 찍고 동영상 찍느라 바쁘다. 말이 필요 없다. 자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그저 숲의 이야길 듣고 기억하고 기록하느라 말이 없었던 거다. 숲을 걷는 그 자체로 좋다. 그냥 수타사 부근의 숲 정원만 다녀가리라던 계획은 산속의 출렁다리까지 다녀오기로 했다. 남편의 희망사항이었으므로. 가는 길은 야자매트길이라 걷기 좋았다. 계곡의 물소리가 듣기 좋았고, 산 아래 언듯 언듯 계곡물도 보였다.
딸이 영상통화를 해왔다. 예쁜 손녀의 얼굴이 나온다.
- 거기 소나무 아래야?
전회기 속 배경을 보고 손녀가 묻는다.
- 응 여기 소나무도 있지
- 그럼 소나무 아래니까 송충이 조심해.
할머니의 안전을 걱정하는 손녀의 소프라노 목소리가 듣기 좋다. 나에게 사랑을 전하는 전화기 속의 얼굴이 나날이 예뻐 보인다. 네이비 톤의 원피스가 얼굴을 돋보이게 한다. 어두울 것 같은 색으로 인해 더 밝은 얼굴의 손녀가 정말 예쁘다. 말없이 숲길을 걸었지만 전화기 속 손녀에게는 다정한 말이 술술 나온다.
걷다 보니 뿌리가 뽑힌 나무가 보인다. 몇 그루의 나무가 단체로 뽑혀 뿌리가 있는 흙더미를 허공에 두고 있다. 몇 십 년을 자랐을 나무가 맥없이 기운을 놓다니. 홍수 때문에 나무가 뽑혔을 수도 있고, 땅이 얼었다 녹으면서 뽑혔을 수도 있고, 눈사태 때문에 나뭇가지가 무거워져서 나무가 쓰러지며 뽑혔을 수도 있다. 잘 지키고 있던 자기 자리에서 한순간에 나무가 뽑혀나가는 무서운 자연의 현상이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상을 다 빼앗아 갈 수 있다. 현재의 시간에 언제나 충실해야 한다. 산길도 마찬가지다. 한 걸음의 발자국도 조심히 걸어가자.
산속의 출렁다리는 말이 출렁다리지 전혀 출렁이지 않는 작은 다리다. 요즘은 전국이 출렁일 만큼 각지에 길고 긴 출렁다리가 얼마나 많은가. 계곡의 산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홍천 공작산 출렁다리는 아기자기하니 귀엽다. 저 건너편의 야자매트길과는 달리 다리건너 돌아오는 길은 등산 수준이다. 울퉁불퉁 돌과 흙으로 이어진 오르락내리락 길이다. 큰 바위도 있다. 등산화도 아닌 크록스 운동하 신고 다녀왔다. 수타사와 수타사 앞의 생태공원을 한 바퀴 걸어보려던 예정이었지 공작산 산행은 예정에 없었기에 등산화 없이 산행을 하고 말았다.
집에서는 늘 누워 지내면서 계속되는 소화불량과 어지럼으로 힘들었는데 그 증상도 벗어나며 산행까지 했으니 기특하다. 전날 밤 잠이 부족했고 매일 계속되는 오전의 졸림 증상도 있었지만 오후 들어 그런 증상에서 벗어나 무사히 홍천 나들이에서 돌아왔다. 수고했다. 그리고 다행이다. 이렇게 나들이할 수 있는 몸이어서 고맙다. 아픈 사람 옆에서 걸어야 했던 남편도 수고한 날이다. 따뜻했던 햇살로 걷기 좋은 날씨를 만들어준 계절에게도 고마운 날이었다.
산나물 축제장에서 취나물 세 뿌리를 받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축제장에서 가져온 취나물을 화단에 심었다. 건물에 가려해도 햇볕도 잘 들지 않는 화단이지만 취나물이 잘 자라 내년에는 예쁜 새싹으로 잘 자라나길 자란다. 다음날에는 명이나물과 곰취로 장아찌를 담았다.
저녁에 집의 창문을 다 열어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삼겹살을 구워 한달 전에 담아 놓은 명이나물 장아찌와 곰취나물 장아찌를 꺼낸 쌈을 싸 먹었다. 현지에 가서 구입한 재료로 담은 장아찌에 삼겹살을 먹으니 그날의 기억이 솔솔 떠 오르는 맛있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