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혜정 Oct 27. 2024

나의 평화를 위해 얼마가 필요할까? (2)

휴직 혹은 퇴직의 사유 (2)

평화란 무엇일까? 나에게 평화란 당위와 욕구가 일치하는 상태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가 하고 싶다. 쉬어야 할 때가 됐는데, 쉬고 싶다. 일해야 하는데, 일하고 싶다.’ 이런 삶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는 삶은, 내적 외적 갈등이 없는 삶이다. 이러한 삶은 도덕이 필요 없다. 신도 필요 없다. 그저 욕구에 따라 행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상태가 된다. 






나에게도 ‘일적인 면’에서 당위와 욕구가 일치하던 평화로운 시절이 있었다. 나는 교육자로서 학생과 교육의 변화와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러한 욕구가 가득했다. 그래서 즐겁게 일했다. 학교 안팎에서 참 열심히도 일했다. 



그런데 욕구와 열망은 화수분이 아니다. 해야 할 일과 역할이 많아지자, 열망을 모두 끌어 모아도 모자란 상태가 되었다.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 많아진 삶은 몸과 마음에 갈등을 가져왔다. 몸은 하고 있으나 마음은 불편한 상태, 몸과 마음의 갈등상태가 이어졌다. 어떤 날은 몸이 이겨서 일을 해내지만, 어느 날은 마음이 이겨서 일을 미룬 뒤 자책하는 날이 많았다. 몸과 마음이 매일 전쟁을 치르니 어느덧 평화도 사라졌다.



인간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 유시민 작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의미 있는 삶이란 ‘즐겁게 일하고, 열심히 놀고, 더 깊이 사랑하며, 더 많은 사람들과 손잡고 연대하는 삶’이라고 말했다. 네 가지 영역이 고르게 활성화되어야 의미 있고 기쁜 삶이 된다는 것이다. 이 기준에 빗대에 봤을 때, 내 삶은 즐겁게 일하며 연대하는 영역이 커지고 놀이와 사랑의 영역이 쪼그라든 삶이었다. 사회적인 삶의 의미는 갈수록 진해졌지만, 개인적인 삶의 의미는 점차 흐려진 것이다. 



그즈음부터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오해 마시라. 나는 인생이 너무 만족스럽고 행복한 사람, 다시 태어나도 나로 태어나고 싶은 사람이라 죽고 싶다는 의미의 죽음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보편적인 ‘죽음’에 관해 생각했다는 것이다.) 사회적인 삶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서 죽음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삶의 유한성과 죽음에 대해 숙고할 때 삶의 의미가 뚜렷해지기 때문이다.



출퇴근 시간 차 안에서, 업무를 하는 틈틈이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큰일이 없다면, 나는 80세까지 무난하게 살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는 상상을 했다. 아침에 현관문 앞에서 입맞춤을 했던 신랑이 갑자기 돌아오지 않는 상상도 했다. 그렇게 되면 무엇을 가장 후회할까?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삶을 더 변화시키지 못한 것? 교육 운동으로 한국 교육을 개선시키지 못한 것? 정신 차리고 돈을 모으지 않은 것? 전부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그것이 가장 후회될 것 같았다. 후회를 넘어 억울했다.



하루는 24시간. 출퇴근 시간까지 약 10시간을 일터에서 보내고, 집에 와서 2~3시간 정도 더 일을 한 뒤 이것저것 정리를 하다 보면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는 시간은 고작 두세 시간 정도. 헛웃음이 났다. 사랑에는 양도 질도 중요하다. 나에게는 사랑할 시간이 부족하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일과 놀이, 사랑, 연대 모두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인생 2막으로 넘어갈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책방을 하고 오빠는 커피를 내리는 거예요. 좋죠?"

"완전 좋지. 바리스타 교육기관 알아봐야겠다."



"아, 역시 초록이 좋아. 김해 내려가서 아버지한테 농사 배울까? 나는 농부, 바비는 책방 하면서 북스테이도 하는 거지. 북스테이 머무는 손님한테 직접 기른 채소로 맛있는 채식밥상을 대접해 보자."

"오! 좋은데요. 굿굿!"



오늘도 술잔을 부딪히며 퇴사 이야기를 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어서. 당위와 욕구가 일치하는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퇴사'는 그런 것이다. 지금은 욕구와 열망만 가득한 그 무엇, 하지만 언젠가 '해야 할' 당위가 될 그 무엇. 언젠가 욕구와 당위가 일치하는 날이 온다면, 내 안의 평화를 위해 결단해야 할 무엇. 다행히(?) 신랑은 현실주의자이자 안정추구형이다. 그래서 매번 머리를 맞대고 퇴사 후 삶을 설계하지만, 당분간 퇴사는 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지독히 이상주의자다. 꿈만 먹으며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적게 벌어도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하며 사는 우아한 가난뱅이를 꿈꾸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늘도 '퇴사'라는 단어에 온갖 공상을 하며, 평화로운 일상을 그려 본다. 






우리는 더 깊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다.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이 일치하는 삶, 

참으로 좋지 아니한가!


언제나 둘이 함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