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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냥 May 24. 2022

탈출놀이

순수하고 과격했던

아침에 초등학교 때 꿈을 꾸다가 깼는데 갑자기 유치했던 추억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나는 90년대 후반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뀔 때 입학을 했다. 시조새 초딩이다. 학교는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5분 거리에 있었고, 당시 아파트 단지가 생기면서 나름 최근에 지어진 학교였다.


나는 초등학교 때 기억이 좋게 남아있는데, 이게 기억이 좋게 왜곡된 건지도 모르겠다. 무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내 인생 가장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던 시기는 초등학교 3~4학년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마음에 맞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 나오는 청소년 드라마 주인공처럼 뭔가 나를 중심으로 세계가 돌아갔던 것 같다.


기억에 남는 추억을 몇 개 끄집어 내 보면, 몇몇 아이들이 떠오른다. 다시 그 시절의 내 모습과 풍경을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서 보고 싶다. 내 기억과 정말 비슷한지 어쩐지 궁금하다. 아쉽게도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과는 한 명도 연락을 하고 있지 않아서, 같이 추억을 공유할 수가 없다.


나는 솔직히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부분이 학교생활을 편안히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었지 않나 싶다. 아빠는 건설업 사장님이었고, 엄마는 선생님이었는데 교육과 사랑에 관심이 많으셨던 엄마는 오빠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전업주부가 되셨다.


그래서 학교 갔다 오면 엄마가 늘 집에 계셨는데, 매일 엄마 밥을 잘 챙겨 먹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어릴 때는 이게 당연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이게 내가 굉장히 운이 좋았던 것이었고, 엄마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계 때문에 집에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는 워킹맘들이 지금은 더 흔하다.


그러나 그때는 엄마들이 주로 주부가 많았고, 일하는 바쁜 엄마들은 좀 드물었다. 이 부분이 초등학교 때는 아이들한테 티가 좀 많이 났는데, 집밥 먹고 다니는 애들은 뭔가 좀 더 깔끔하고 얌전히 공부를 열심히 했고, 부모님이 바쁘신 아이들은 비슷한 옷차림에 늘 열쇠를 목에 걸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초등학교는 하나의 작은 사회였다. 나는 알게 모르게 이런 우리 집의 여유로움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은 꽤 괜찮은 단지의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다른 소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 조금 충격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게 노는 데 있어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아파트 놀이터가 크고 미끄럼틀이 잘 돼 있어서 학교 끝나면 반 친구들끼리 우르르 몰려가서 탈출놀이를 했다. 지금은 놀이터가 유아용에 맞춰져 있지만, 나 어릴 적만 해도 놀이터는 온통 모래바닥과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놀이기구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유아들이 놀기에는 위험한 편이었고, 주로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는 초딩들의 놀이장소였다. 그때 탈출놀이 멤버가 7-10명 정도 됐었는데, 남자 여자 섞여서 자주 놀았다. 당시는 방과 후 학원을 다니는 애들은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 매일 같이 놀 수 있었다.


탈출놀이는 한쪽 미끄럼틀에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쪽 미끄럼틀로 탈출을 하는 룰이었다. 먼저 술래를 뽑고, 나머지 애들끼리 편을 나눈다. 술래가 아닌 아이들은 미끄럼틀 각각에 숨어있는데, 아무도 입을 열어선 안된다. 술래가 지나갈 때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조용히 움직여서 탈출을 하는 거다. 모두 먼저 탈출에 성공한 편이 이긴다. 탈출할 때는 미끄럼틀을 내려가면서 탈~출~! 하고 소리를 친다. 쇠로 된 미끄럼틀이어서 내려갈 때 우당탕 소리가 난다. 지금 아이들이 밖에서 노는 거에 비하면 그 시절 아이들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을 법한 과격한 놀이를 즐겼다. 다치지 않았던 게 신기할 정도로.


술래는 눈을 감고 시작한다. 나는 눈을 실눈을 조금 뜨기도 했는데, 미끄럼틀 구조를 거의 알고 있기 때문에 잡기에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먼저 탈출에 성공한 아이들은 밑에서 지켜보면서 훈수를 두는데, 같은 팀이 이기게끔 정보를 알려준다. 밑에서 지켜보면 그 아슬아슬한 모습이 긴장과 재미가 있다. 간혹 탈출했던 아이들이 다시 미끄럼틀에 올라가서 술래를 헷갈리게 만들기도 한다. 친하거나 좋아하는 애가 술래한테 잡히지 않도록 괜히 도와주기도 한다.


술래가 더듬더듬거리면서 숨죽여 있는 아이들의 손이나 몸을 터치할 때는 정말 스릴 넘친다. 겁이 별로 없던 나는 심지어 미끄럼틀에 딸려 설치되어 있는 그네 기둥에 올라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높이가 아찔하다. 철봉 같은 것에 올라가기를 좋아했던 나는 지금과 달리 몸이 몹시 가벼워 날다람쥐처럼 옮겨 다니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삼삼오오 모여서 탈출놀이를 중독처럼 했던 큰 이유는 아마도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어울려 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같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놀이터였다. 지금은 갈 데도 많고 놀거리도 많지만, 그때는 딱히 놀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건전하게 놀이터에서 열심히 놀았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웃겼던 건, 탈출놀이를 할 때는 친한데, 교실에서는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선 긋는 서로의 암묵적 규칙 같은 게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제일 먼저 놀이터로 달려간 우리는 놀이터를 점령해서 놀다가 해가   파하는 식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탈출놀이 멤버가 일명  반의 인싸모임이었던  같다. 그렇지만 특정 멤버를 정해놓진 않아서  아이들 누구나 같이   있었다. 뺑뺑이도 미친 듯이 돌렸는데, 초딩들의 에너지를 한껏 분출할  있었다. 그네와 시소는 무조건 서서 탔고, 제일 좋아했던  그네  개를 이어서 타는 바이킹이었다.  작은 놀이터에서 우리의 놀이는 무한했다.


아무튼 탈출놀이는 사춘기를 앞둔 초딩들의 미묘한 시간이었다. 사랑이 싹트기도 하고, 다툼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놀 때만큼은 모두가 평등했고 자유로웠다. 자녀교육에 선이 있었던 엄마가 공식적으로 허락했던 유일한 놀이이기도 했다.(아마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라 엄마가 언제든 창밖으로 내려다볼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탈출놀이를 빼놓고 내 초등학교 시절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


친구의 가정사나 가진 것과 상관없이 그저 놀이를 같이 즐기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친구인지가 중요했던 시절. 누구나 어울려서 즐겁게 놀 수 있었던 그 시간이 그립다. 학교 친구들과 아무 걱정 없이 까부는 어린아이들의 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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