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지나간 자리 22화
부끄러움은 인간이 스스로를 단련하는 가장 조용한 스승이다 - 에드먼드 버크
얼마전, 테니스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처럼 네 명이 복식 경기를 하기로 했는데, 그날은 다섯 명이 모였다. 자연스럽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쉬기로 했다. 첫 게임을 마친 뒤, 내가 쉬는 순서였다. 잠시 차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고, 돌아왔을 때는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곧 끝나겠지 싶어 지켜보고 있었는데, 게임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자세히 보니 새 게임이 시작된 상태였다. 내가 없는 사이, 네 명이 그대로 경기를 이어간 것이다. 약속한 순서와 다른 상황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경기가 끝난 뒤, 나는 상황을 확인하듯 물었다.
“왜 순서대로 안 했어요?”
후배는 담담하게 답했다.
“선배님 안 계시길래 그냥 했어요.”
그 순간, 말투가 다소 강해졌다.
“전화라도 하지 그랬어요.”
의도와 달리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는 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방금 전 장면이 떠올랐다. 굳이 높일 필요 없던 목소리, 사소한 상황을 크게 만든 나의 태도. 생각해 보니 그들은 일부러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날의 일은 아주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됐다. 누군가를 일부러 배제하려 했던 것도 아니고, 악의가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 다만 각자의 판단이 엇갈렸고, 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 조금 서툴렀다. 집으로 돌아오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지키고 싶었던 건 ‘순서’가 아니라 ‘존중’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존중은 상대에게 요구하기 전에, 먼저 내가 보여줬어야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 기다림이 필요한 순간, 그리고 여러 선택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창피함이라는 감정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대신 질문 하나를 남겼다.
‘나는 지금 어떤 어른으로 행동하고 있었을까.’
나이가 들수록, 직함이 쌓일수록 더 조심해야 할 것은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감정이 태도로 드러나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말이 있었고, 굳이 바로 짚지 않아도 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조금 더 늦게 말하려고 한다. 상황을 한 번 더 살피고, 상대의 의도를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실수 이후의 모습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기 위해서다. 창피함은 지나갔지만, 그날의 장면은 기준처럼 남아 있다.
다음번 비슷한 상황에서, 그 기준이 나를 조금 더 단단한 쪽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