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14
우리 집 바로 앞, 도로 하나만 건너면 대형 마트가 있다. 처음엔 단지 가까워서 자주 갔던 건데, 어느새 우리는 하루 한 번은 꼭 들르는 ‘참새 방앗간 부부’가 되어버렸다.
오후쯤이면 딸아이가 “엄마, 지금 어디야?” 하고 수시로 전화를 해온다. 대부분의 경우, 대답은 같다.
“응, 지금 마트야.”
마트 직원도 우리가 하루를 지나서 가면 꼭 묻는다.
“어제는 왜 안 오셨어요?”
계산할 때면 이름도, 전화번호도 이미 외우고 있다. 단골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거의 ‘우수고객’이다.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내가 아내에게 말했다.
“우리 아파트 주변 상권은 참 좋아. 냉장고 없어도 되겠어. 나가면 다 있으니까.”
아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단순히 ‘살 것이 있어서’ 매일같이 마트를 가는 건 아닌 듯하다. 마트에 들어설 때는 뚜렷한 목적 없이 발걸음을 옮기지만, 입구를 지나 진열대마다 빼곡히 채워진 색색의 과일들과 한껏 정리된 선반들을 마주하면 어느새 마음이 환해진다.
아내는 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앞서 걷고, 나는 그 뒤를 따라 카트를 끈다. 야채, 과일, 견과류, 아침식사용 식재료까지 하나씩 빠짐없이 챙긴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토마토는 늘 잊지 않는다.
“이건 건강식으로 필수잖아.”
아내의 말에 나는 미소만 지을 뿐이다. 말은 없어도 함께 카트를 밀고 다니는 그 시간이 그저 좋다.
마트 입구를 들어서면 늘 그렇듯 다양한 풍경이 펼쳐진다. 쇼핑카트를 밀며 발걸음을 옮기면 왁자지껄한 소리, 무수한 상품들 사이로 사람들의 표정이 교차된다.
아이와 함께 나온 엄마는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아이는 이것저것 신이 나서 꺼내 담는다. 색색의 과자,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시리얼, 달콤한 음료. 엄마는 아이의 손길을 따라가다가, 결국 몇 가지는 조용히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마음은 다 사주고 싶지만, 계산대에 설 때의 무게를 알기에. 아이 몰래 빼낸 그 마음 한켠엔 미안함과 아쉬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아이의 웃음 하나에 다시 용기를 낸다.
“다음에 또 사줄게.”
그 말은, 지금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약속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한 부부가 조용히 진열대를 살핀다. 손에 든 바구니는 텅 비었지만, 그 눈길은 진지하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위해 장을 보러 나온 딸은 유통기한을 꼼꼼히 확인하며 선반 앞에 멈춘다.
"아버지는 요즘도 두유 좋아하시나? 어머니는 치아가 약해지셔서 딱딱한 건 피해야 할 텐데…"
그들은 물건보다 더 많은 추억과 정성을 고르고 있다. 물건을 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담는다. 누군가는 자식을 생각하고, 누군가는 부모를 떠올리며 장을 본다.
사람마다 장보는 이유가 다르듯, 나와 아내도 가족을 위한 마음으로 카트를 민다. 아내는 양파를 손에 들고 신중히 고른다. 채소 하나하나를 손끝으로 살피며 가격표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요즘 너무 비싸졌네…"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살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는 모습. 두부 한 모를 집으려다 말고는 다시 내려놓는다.
“여기보단 무인판매대 게 더 신선하고 싸요.”
뭘 하나 사도 그저 사는 법이 없다. 가성비와 신선도, 가족의 건강까지 꼼꼼히 따지는 아내다. 예전엔 그 모습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 섬세함이 고맙다.
나는 그런 아내의 틈을 비집고 내가 먹고 싶은 과자나 음료를 슬쩍 카트에 넣는다. 하지만 아내는 금세 알아차리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는다.
“이건 몸에 좋지 않아요.”
살짝 서운해지지만, 곧 인정한다. 아내 말 들어서 잘못된 적이 거의 없다.
가끔은 마트 한복판에서 의견이 갈린다. 나는 “이왕 나온 김에 이것도 사자”고 하고, 아내는 “지금 안 사도 돼요”라며 제동을 건다. 처음엔 은근히 고집도 부려 봤다. 하지만 이젠 그냥 아내 말을 따르는 게 익숙해졌다. 굳이 우리 둘의 성향을 나누자면, 나는 현실적인 편이고 아내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이 조합에서는 대체로 아내의 판단이 옳았다. 그래서 이제는 굳이 고집을 부리기보다, 조용히 따르는 것이 평화로운 길임을 알고 있다.
물건 하나를 고르는 일에도, 말 한마디에 웃고 다투는 순간에도, 그 속엔 우리만의 일상과 정이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이런 실랑이조차도, 마트 장보기는 늘 행복하다. 단지 원하는 걸 살 수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마트라는 공간이 주는 풍요로움 속에서, 우리는 함께 생활필수품을 고르며 소소한 행복을 나눈다. 단순한 일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여유와 즐거움은 크다.
마트에서 아내와 함께 걷는 시간은 마치 일상의 데이트 같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고른 재료로 차린 밥상을 마주할 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작은 장바구니에는 계란 한 판, 토마토 한 봉지, 견과류 한 줌, 그리고 서로에 대한 애정 한 스푼이 담겨 있다.
그렇게 오늘도 우리의 하루는 따뜻한 기억으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