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13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걸 오래 기억하세요?”
며칠 전, 제자가 내게 건넨 질문이다. 순간 웃음이 났다.
“기억이란 게 그렇단다. 좋은 건 오래 남고, 아픈 건 더 오래 남는 법이지.”
그 말을 하고 나서 문득 생각에 잠겼다. 살아가면서 좋은 기억만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삶은 언제나 그렇듯 따뜻함과 아픔, 기쁨과 후회가 뒤섞인 이야기의 연속이다. 기억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뿌리처럼 내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때로는 한 장의 사진, 한 줄의 문장, 스치는 향기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불쑥 불러오곤 한다. 기억에는 여러 얼굴이 있다. 따뜻한 기억, 아픈 기억, 잊고 싶은 기억, 오래도록 지키고 싶은 기억. 그 모든 기억은 결국 나에게 무언가를 남긴다. 과거로부터의 교훈, 지금의 나를 만든 정체성, 그리고 누군가를 잊지 않게 해주는 다리 같은 것들.
다행히도 내게는 따뜻한 기억이 많다.
교대를 졸업하고 총각 선생으로 교직에 첫발을 내디뎠던 시절, 처음 만난 교장선생님은 내게 아버지 같은 분이었다. 처음엔 ‘교장실’ 문 앞에 서는 것조차 두려웠다. 하지만 그분은 내유외강의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따뜻한 말투, 다정한 눈빛, “전 선생님~” 하고 불러주시던 호칭 하나가 초임 교사였던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자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눈이 소복이 내리던 어느 겨울 새벽, 사모님께서 손수 부침개와 된장을 소반에 담아 내 방으로 가져다주셨다. 그 소반 위에 덮인 보자기에는 하얀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정성과 온기는 지금도 내 마음 깊숙이 남아 있다. 그분은 내가 잘했을 때는 아낌없는 칭찬을, 실수했을 때는 따뜻하지만 단호한 조언을 주셨다. 지금도 그분의 품격과 따뜻한 마음은 내 안에 살아 있다. 그분을 만난 건 내 교직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
얼마 전에는 39년 전 제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선생님, 저 김○○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김○○? 당연히 기억하지! 어떻게 연락했니? 반갑구나.”
그 제자는 내 첫 담임 반의 반장이었다. 쉰에 가까운 성인이 된 아이가 여전히 그때의 눈빛을 간직한 채 전화 속 목소리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희를 그렇게 오래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내가 더 고마웠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잊지 않고 찾아와 준 그 마음이야말로, 교사로 살아온 내 삶에 주어진 가장 따뜻한 선물이었다.
또 다른 소중한 기억은 가족과 함께한 작은 행복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 매년 여름이면 텐트를 싣고 떠났던 영덕 바닷가. 허름한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 먹고, 모둠회를 시켜 먹으며 웃던 그 여름날들. 바쁘고 치열했던 교직 생활 속에서 그 시간들은 나를 숨 쉬게 해 준 고요한 쉼표였다.
물론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다. 교직 37년 6개월, 쉬운 길만 있었던 건 아니다. 대구에서 장학사로 지내던 시절, 5평 남짓한 원룸에서 바퀴벌레와 씨름해야 했다. 퇴근 후 문을 열면 벽을 기어 다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 수 없이 “같이 지내라”는 농담에 웃으며 항복했던 기억마저 내 삶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일을 포함해 교직 생활을 하며 마음 아프고 힘든 순간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사람과 함께한 따뜻한 기억들이었다. 스승의 다정한 눈빛, 제자의 잊지 않음, 가족과의 소소한 행복 같은 기억들이 그런 아픔과 서러움을 덮어주곤 했다.
돌아보면, 기억은 결국 사람을 향한다.
그래서 나는 살아가며 누구에게든 ‘나쁜 기억’, ‘힘들었던 사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화향천리, 인향만리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의 품격은 향기처럼 멀리 간다. 훗날 누군가의 마음속에 “참 좋았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그립다, 생각난다! 이런 사람으로 말이다.
내 이름을 기억해 주는 제자, 내가 잊지 못하는 스승,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인연들. 그 사실만으로도 삶은 더 따뜻해지고, 더 아름다워진다. “기억은 마음의 일기장”이라는 말처럼, 기억은 시간을 건너온 마음이다. 그 마음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내일의 나를 이끌어 줄 것이다.
결국 삶이란,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조용히 모아가는 여정이고
그 순간 순간 속에서 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이
조금 덜 아프고, 조금 더 행복하길.
그리고 나 또한
아름다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나의 아픈 기억을 덮으며
하루 하루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