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소중히 살아야 하는 이유

하루치의 따뜻함 15

by 전태영
<하루치의 따뜻함, 열다섯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하루하루 쌓아온 기록이 어느덧 열다섯 번째 페이지에 닿았습니다. 퇴직을 앞두고 시작한 작은 글쓰기가 이제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이자,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쉼이 되기를 바라는 인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이어 적어봅니다.

잠시 머물고 싶은 날, 이 글이 당신의 마음에도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아직은 뜨겁기만한 햇빛이 잔잔히 들어오는 오후, 교실에 앉아 있자니 문득 그날의 기억이 마음을 스쳤다.

“천운입니다. 1cm만 빗나갔어도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의사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순간, 온몸에 힘이 풀렸었다. 병원에서 아내를 바라보며 수없이 떠올렸던 최악의 상상이 현실이 될 뻔했던 그날. 끔찍한 낙상사고에도 큰 부상이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오래도록 울림을 남겼다.


그날은 3박 4일 가족 제주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딸의 따뜻한 제안으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요즘 다들 해외여행 가는데, 엄마는 한 번도 못 가봤잖아.”

서른이 넘은 딸은 엄마를 향한 사랑이 각별했다. 덕분에 우리는 오랜만에 바쁜 일상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온 가족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해외 대신 마음이 끌렸던 제주로, 아내와 나, 딸과 사위, 아들까지 모두 함께했다. 출발 전부터 설렘이 가득했다. 딸은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 준비 상황을 확인했고, 나는 날씨와 명소 정보를 챙겨 보았다. 공항에서 만난 가족의 얼굴에는 오랜만의 여유가 묻어 있었고,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과 구름 사이로 웃음이 번졌다.


여행 내내 아내는 창밖 풍경에 감탄했고, 나는 그런 아내를 바라보며 하루 일정을 정리했다. 딸은 카메라로 가족의 순간을 담았고, 아들과 사위는 묵묵히 운전을 맡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산양큰엉곶’이었다. 걷기 좋은 숲길과 곳곳의 조형물들이 여유를 선사했고, ‘죄명: 너무 예쁜 죄’라는 포토존 앞에서 딸은 엄마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아내는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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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화롭기만 했던 여행은 마지막 날 뜻밖의 사고를 마주했다. 우리는 함덕 해안가에 들러 남은 시간을 보내려 했다. 차 한잔을 나누고 기념사진을 찍으려던 찰나였다.

“이쪽이 배경이 더 예쁘겠네.”

아내는 그렇게 말하며 바위 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카메라를 조정하고 있었고, 아이들과 사위도 각자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귓가를 찢는 비명이 들려왔다.

‘악!’

돌아보니 아내가 바위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몇 초도 안 되는 그 순간이 내겐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내가 사라지는 장면은 심장을 찢는 듯했다. 다행히 사위가 신속히 119에 신고했고, 곧 구급차가 도착했다. 병원으로 실려 가는 아내를 보며 온몸이 덜덜 떨렸다.

‘혹시라도 아내가 잘못되면…’

그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늘 내 옆에 있을 거라 믿었던 아내.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고, 작은 습관까지 기억해 주고, 잔소리처럼 들리던 말들로 내 하루를 채워주던 사람. 만약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다행히 아내는 의식이 선명한 채 응급실에 있었다. 머리에 혹이 생겼지만 큰 이상은 없었다. 아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기야,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나 동시에 깨달았다.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을. 36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내가 늘 곁에 있을 거라 믿었지만, 단 한 번의 사고가 그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일깨워 주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영원할 거라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임을 새삼 알게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 아내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목소리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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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아내의 행복한 미소를 더 오래 지켜주고 싶어졌다. 평범한 일상 속 작은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아내의 손을 더 자주 잡고, 사소한 일에도 “고마워”라고 말하려 애쓰게 되었다. 하루를 마칠 때는 반드시 “오늘도 고생했어”라는 인사를 건넨다. 아이들과의 대화도 더욱 귀하게 여긴다. 작은 말과 손길 하나가 얼마나 큰 기적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3박 4일 여행이 예기치 못한 사고로 6박 7일로 길어졌지만, 그 시간은 우리 가족에게 소중한 교훈과 선물을 남겼다. 가족은 언제나 곁에 있을 존재가 아니라, 함께할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할 인연이라는 것을. 아들의 부축, 딸의 눈물, 사위의 빠른 대처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의 울타리’임을 확인했다. 평소에는 그냥 함께 사는 사람들 같았던 가족이지만, 위기의 순간 서로의 마음은 신뢰와 사랑으로 단단히 이어졌다.


이제 나는 안다.
당연하지 않은 오늘이 당연하게 느껴졌던 그날을 떠올리며, 오늘 하루를 더 깊이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아내가 곁에 있다는 사실, 아이들과 웃으며 지낼 수 있는 시간, 평범한 하루가 사실은 모두 기적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다짐한다.


오늘을 가장 소중히, 감사히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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