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17
<하루치의 따뜻함, 열일곱 번째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쌓여온 기록이 어느덧 열일곱 번째 페이지에 닿았습니다. 햇살이 잔잔히 스며드는 교실에서 한 장면을 떠올리듯, 오늘은 ‘쉼’이라는 단어를 곱씹게 됩니다. 바쁘게 흘러가는 길 위에서도,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잠시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의 하루에도 작은 휴게소 같은 쉼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하루치의 따뜻함’을 천천히 이어 적어봅니다.
막히는 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차창 밖으로 낯익은 표지판이 스쳐 지나간다.
‘휴게소 3km 전방.’
짧은 문구가 전하는 묘한 안도감.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쉬어가자'는 결정을 내린다. 따지고 보면 꼭 필요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래서일까, 그 멈춤이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잠깐, 쉬었다 갈까?
어딘가 먼 곳을 향해 달릴 때, 우리는 어김없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는다. 꼭 필요해서라기보다, 마치 습관처럼 들르게 되는 곳. 피곤해서, 아니면 속이 허전해서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단순하고 막연한 이유일 때가 많다. 그냥, 한 번쯤 쉬어가고 싶어서. 이유 없이도 괜찮은,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그런 장소.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벤치에 앉는다. 누구는 차 안에서 먹을 간식을 사고, 누구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함께 탄 사람과 오늘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걷는다. 다들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자리에 머물고 있는 듯한 느낌. 서로 다른 발걸음, 각기 다른 표정들 속에서 이상하게도 위로를 받는다.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은근히 평온해진다.
누군가는 말한다. 휴게소는 단지 고속도로 위의 편의시설일 뿐이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말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휴게소에는 사람들의 크고 작은 사연이 조용히 내려선다. 소풍을 가는 아이의 들뜬 표정, 졸음에 겨운 운전자의 모습, 혼자 커피를 들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 멀찍이 앉아 휴대폰을 붙든 채 말없이 앉아 있는 누군가. 누군가는 처음 떠나는 장거리 운전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목적지도 없이, 길 위에 있고 싶은 날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감정의 무게가 이 작은 공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언젠가 나는 별다른 계획도 없이 아내에게 제안했다.
그냥…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서 차 한잔 하고 올까?
무언가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우리는 무작정 고속도로 IC를 타고 올랐고, 속리산 휴게소에 도착했다. 벤치에 나란히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능선을 이루던 뒷산들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가끔 웃으며, 그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다시 방향을 틀어 조용히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마음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저 멈추어 서서, 아무 이유 없이 함께 머물렀다는 것. 그 시간이 주는 평온이 지금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바삐 흘러가던 일상도 이곳에서는 잠시 숨을 고른다. 나는 그런 휴게소의 풍경을 좋아한다. 빠르게 흘러가던 길 위에서 잠깐 멈춘다는 것. 어쩌면 삶에서도 꼭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
속도를 늦추는 건 결코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치지 않기 위한, 다시 달리기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일지 모른다. 휴게소에서 마시는 따뜻한 어묵 국물 한 모금, 갓 구운 호두과자 하나,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스피커 소리… 그런 소소한 것들이 우리를 다시 길 위로 이끌어주는 작은 위로가 된다.
한자 ‘休(쉴 휴)’는 사람(人)과 나무(木)가 어우러진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나무 그늘 아래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의 형상. 우리는 어쩌면 그런 쉼을 본능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쉼은 단절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고, 준비다. 나는 종종 가수 정미조의 노래, ‘7번 국도’를 떠올린다.
정동진 해 뜨는 아침, 바닷길을 따라 이어지는 국도 위에 흘러간 사랑의 기억을 담은 노래. 갈매기 소리, 포장마차, 바닷바람…
그런 풍경들이 노랫말 속에서 생생히 그려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누구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모두가 같은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가끔은 걸음을 멈추고, 마음속 짐을 내려놓고, 다시 걷기 위한 힘을 얻는 일이다. 그러니, 고속도로 휴게소를 찾는 진짜 이유는 정말 무언가가 필요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조금은 멈추고 싶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괜찮다고 느끼고 싶어서.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다시,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삶이라는 도로 위에 오른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에도,
지금 이 순간 작은 휴게소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