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치의 따뜻함 18
이제 가을이다.
서재에 앉아 이 글을 쓰노라니, 창문 틈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살며시 불어온다. 여름의 무더위와 태풍, 장마와 가뭄을 이겨내고, 계절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우리에 게 가을이라는 선물을 건넨다. 가을은 단순한 계절의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고추잠자리를 잡으며 두근거 리던 마음,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추던 길, 맑고 푸른 하늘빛, 그리고 황금빛 들판과 울긋불긋 단풍으로 익어가는 산길이 모두 어우러진 한 폭의 수채화다.
나는 가을을 무지개로 그리고 싶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그리고 남색까지, 여러 빛깔이 모여 가을의 깊은 감정과 시간을 완성한다.
빨강은 사랑과 열정의 색이다. 가을이면 문경새재에서는 사과축제가 열린다. 그 곳에서는 백설공주가 사랑했다는 전설의 사과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온갖 색 깔과 모양의 사과들이 축제장을 풍성하게 채운다. 그 중에서도 반들반들 빛나는 '감 홍' 사과는 달콤한 유혹처럼 손길을 끈다. 사과의 붉은 빛은 결코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이 말하듯, 그 속에는 수많은 태풍과 땡볕,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빚어낸 것이다. 가을의 붉은 열매는 그 어느 것보다도 깊은 사랑과 열정, 그리고 인내의 결실이다.
주황은 익어가는 시간이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단풍잎은 붉고 주황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 한 폭 한 폭은 마치 불꽃처럼 산을 붉게 물들이며, 천천히 익어가는 생명의 마지 막 절정을 보여준다. 주황빛 단풍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따스하게 빛나고, 황금빛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풍성한 가을의 결실을 알린다. 익어감 속에서 우리는 멈춰 서서 시간을 붙잡고, 지나온 모든 순간을 되새기며 삶의 깊이를 느낀다.
노랑은 햇살의 여운이다. 거리마다 쌓인 은행잎 낙엽은 가을 햇살 아래 물감을 쏟아 부 은 듯 노랗게 빛난다. 사방으로 노란 은행나무 사이를 걷노라면 은행잎 속으로 풍덩 빠 져드는 기분이다. 그 노란 빛은 희망이고, 추억이다. 낙엽 밟는 소리에 마음마저 한결 가벼워진다. 노랑은 이렇게 풍성함과 다정함, 그리고 삶의 넉넉함을 노래한다.
초록은 가을 속에도 꿋꿋이 남아 있는 생명의 흔적이다. 모든 잎들이 붉고 노랗게 물 들어가는 사이, 솔잎은 여전히 푸른빛을 잃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 그 단단한 솔잎의 초록은 삶의 끈질긴 의지와 닮았다. 가을이 끝을 알리는 듯 보여도, 솔잎은 겨울을 견디고 다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새로운 시작'의 상징이다. 이렇게 초록은 가을 의 화려한 변화를 조용히 지켜보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파랑은 깊어지는 하늘의 색이다. 가을 하늘은 유난히 높고 맑다. 그 파란빛 아래서 깊이 숨을 들이쉬면, 마음까지 탁 트이며 평온이 찾아온다. 외로움 속에도 평화가 깃 드는, 내려놓음의 빛깔이다.
저녁 무렵 하늘이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 때, 보라는 가을의 고요한 사색이다. 저녁 하늘이 천천히 보랏빛으로 물들 때, 마음 한 켠에도 차분한 깊이가 스며든다. 보라는 바쁜 일상 속 잠시 멈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색깔이다. 가을이 전하는 조용한 위로이자, 우리 내면의 소리를 듣게 하는 시간의 빛깔이다.
남색은 계절의 마지막 붓질이다. 무성했던 나뭇가지가 앙상해질 때, 가을은 깊고 짙은 울림을 남기며 모든 것을 정리하고 비워낸다. 그 끝자락에는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 와 새로움이 숨어 있다. 가을의 무지개 빛깔들은 모여 한 폭의 '가을'이라는 풍경화를 완성한다.
하지만 가을은 단순히 아름다움만 품은 계절이 아니다.
가을은 '수확'의 시간이며, 인내와 견딤의 결실이기도 하다. 무더위와 태풍, 장마와 가뭄을 견뎌낸 땅이 결국 풍성한 열매를 내놓듯, 우리 삶도 진정한 결실을 맺으려면 견뎌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항해하는 배가 늘 잔잔한 바다만 만나는 것이 아니듯, 우리 역시 때로는 거친 풍랑과 파도에 맞서야 한다. 그 모든 고난을 지나야만 비로소 목표에 닿을 수 있다.
삶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누군가의 삶이 탄탄대로처럼 보여도, 그 역시 수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을 겪어왔을 것이다.가을의 무지개빛 스케치를 하며 나는 생각했다.이렇게 아름다운 색과 탐스러운 열매로 우리에게 선물을 주는 가을' 속에, 우리 삶의 다양한 빛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계절 '가을이 완성되기까지 수많은 사연과 시간이 있었음을. 우리는 종종 지금 가진 것의 소중함을 잊곤 한다. 익숙한 일상과 당연한 하루에 무뎌질 때가 많다. 하지만 내가 건강하다는 것',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임을, 잃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가을의 깊은 색들 속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평범한 하루가 가장 큰 행복' 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특별한 날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진짜 행복을 찾고 싶다.
오늘도 그저 평범한 하루에 감사하며, 내 삶의 가을을 천천히, 그리고 곱게 물들여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