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IRIMI Oct 14. 2021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가까운 사이일수록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

남편은 퇴근길에 가끔 장미꽃 두 송이를 사 온다.
한 송이는 나를 위해, 다른 한 송이는 어린 딸을 위해.



 평소보다 더 스트레스를 받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하루 종일 저기압인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종종 장미꽃을 사들고 집으로 들어온다. 고작 작은 꽃 몇 송이인데, 잔뜩 구겨진 마음이 스르륵 풀리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 고마움을 남편에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입 밖으로 내기에 다소 쑥스럽기도 하고 '고맙다'라는 말이 너무 가벼워 보이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나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어린 딸은 정확한 표현으로 남편에게 감동을 주곤 한다. 꽃병에 꽂힌 꽃을 보고 또 보면서 좋아 까무러치는 것은 물론, "고마워 아빠, 사랑해 아빠!"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조잘댄다. 심지어 아빠가 출근하고 없을 때도 꽃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던 딸은 급기야

" 고마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어." 라며 평소 무뚝뚝한 엄마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감사가 쉽다.

 일상에서 오가며 만나는 독일 사람과는 기본적인 인사가 'Danke schön / 정말 고마워요 (당케 쉔)'이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눈으로 생긋 웃으며 '고마워'를 외치는 나로서는 왜 이렇게 가까운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힘든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밖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세상 친절하게 굴면서 부모님이나 남편 혹은 아이에게는 왜 살가운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걸까.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마음속으로는 눈물 나게 고맙고 사랑스럽고 정말 너무너무 행복한데, 그 감정이 밖으로 나오기까지 강력한 필터링을 걸쳐 겨우 '고마워' 한마디가 나온다는 느낌이랄까. 화려한 미사여구나 이모티콘에서나 볼 수 있는 격한 표현들이 마음속에는 이미 차고 넘치는데 정작 초라하기 그지없는 표현만 하고 있으니. 이 고민의 끝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유난히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부탁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적어도 '기억'이라는 것이 남아있는 어린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면 갖고 싶은 장난감    시원하게 갖고 싶다 이야기하거나 사달라고 조르며 떼쓴 기억이 없다. 학교 친구들과 갈등이 있거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을 때도 충분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있었을 텐데 혼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으며 억지로 삭혔다. 해결되지 않았지만 해결된  하기에 익숙했다. 특히 부모님께는 어떠한 힘든 모습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님도 나의 힘듦을 일일이 들어주실 마음의 여유가 없으셨다. 게다가 부모님의 불같은 성격과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함까지 더해져, 나는 누군가에게 결핍이나 부족함을 드러내는 방법을 모른  자라났다.


 그래서 힘에 버거운 일을 만날 때에도 괜찮은 , 쿨한 ,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들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그땐, 그런  모습을 스스로 어른스럽다 느꼈고, 부모님도 일찍 철이   내지는  문제없는   가는  정도로 인지하신 듯하다. 하지만 실은 그런 차분한 껍데기 내면으로 크고 작은 상처들과 슬픔, 외로움과 불안이 가득했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서였을까. 인위적인 밝음을 덕지덕지 얹은 모습으로  오랜 시간 동안 주변 사람을, 심지어  조차도 감쪽같이 속여왔다.



결혼을 하니 내가 둘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감정을 솔직히 말할 사람이 생겼다. 인생 처음으로 껍데기 속에 잔뜩 감추어두었던 어두운 감정을 솔직히 꺼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놀라웠다. 좋은 남편을 만나서 무척 감사했지만 한편 그런 좋은 사람을 만남으로써 나의 내면은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나 조차도 속여왔던 내 감정을 남편이 알게 되는 순간부터 남편은 나의 비밀을 아는 '또 다른 나'로 인식되었다. 남편에게는 나 스스로에게 하듯 심한 말 힘든 말들을 잔뜩 해대고, 밖으로 나가면 다시 친절 한말, 상냥 한말 들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심지어 나의 이면을 있는 그대로 남편에게 들켜 버리고 나니 그것대로 한심하고 밉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남편은 완전한 내가  수는 없었다. 그는  명의 인간 남자이며, 냉정하게 말하면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타인이었다.

보통 나의 치부가 드러나거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게 된 날이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으로 숨어 들어가 사람들과의 소통을 끊었던 나였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자책하고 자학한 후에 완전히 새로운 '긍정'이라는 가면을 쓰고 세상으로 나오기 일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어두운 감정을 숨길 수도, 혼자만의 공간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 즉 결혼생활이 펼쳐졌다. 행복할 때야 한없이 즐거웠지만, 정신적으로 힘들거나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남편이라는, '또 다른 나' 이면서 '완전한 타인'을 피해 도망갈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나름 야심 차게 마련했던 방어기제에 큰 오류가 생겨버린 것이다.

 

 베를린에서 자리 잡는 1년 동안 그 스트레스 수치는 점점 오르다가 아이를 낳고 2년 동안 정점을 찍었다.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불평과 짜증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준 남편이 참 대견하고 고맙다.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의 감정의 그네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버텨준 그가 경이로울 지경이다. 베를린에서 살게 된 1년 동안, 일주일 중 울지 않은 날이 손에 꼽힐 만큼 매일을 힘듦에 오열했던 나에게 궂은소리 한마디 없이 그저 안쓰럽게 바라봐준 그런 사람이 우리 남편이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처음 이 문장을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나를 미워하고 저주했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다른 이들을 무척이나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것이 있다면 소유하기 이전에 남들에게 퍼다 나르기 바빴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말동무가 되어주었으며 정성을 다해 타인을 섬겼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 아무도 없는 외딴 베를린에 떨어졌을 때부터 내가 이제껏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에 한계점이 찾아왔다.

 한국에서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커리어, 누군가의 인정, 외부로 부터 듣는 칭찬과 격려들을 양분으로 삼아 다른 이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결국 남들이 주는 사랑을 가지고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었고 나를 향한 사랑이라곤 하나 없이  비어있는 속마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남편과 아이를 나의  다른 분신으로 여기고, 따스한 사랑의 눈이 아닌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음에 숨이  막혔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도달한 결론은 나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내가 감당할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음속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억지로 쥐어짜 내는 사랑은, 결국 나도 상대방도 모두 만족시킬  없었다. 되려 상처가 되기도 했다. 나를 사랑하는 첫걸음은 (생각보다 볼품없고 한없이 초라할지라도) 나의 있는 그대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있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진짜 나와 마주했고, 욕먹을까 , 혼날까 , 비난당할까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전히 작고 어린 나를   벌려  안아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것을 몸소 깨닫고 나자, 신기하게도 ''라는 존재가 부모님과 남편, 그리고 아이로부터 조금씩 분리되기 시작했다.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억지로 쌓아 올리던 나를 무너뜨리고 나니 한껏 옭아매고 있던 걱정과 염려들이 알맹이 없는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에 세워둔 계획을  지키지 못해도 스스로 잘했다고 칭찬해주기 시작했다. 그날의 외모가  맘에 들지 않아도 충분히 예쁘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일의 성과가 나지 않아도 과정에 최선을 다한 나를 무한 격려해주었다. 나에게 쏟는 관심과 사랑이 새롭고 낯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손발이 오글거리는 순간을 애써 참아내며 스스로를 보듬어주었다. 그러자 믿을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안돼서 속상한 일들보다  정도여서 다행인 일들이  많이 보이고, 질책하고 불평할 일들이 감사하고  괜찮은 일로 변화되었다. 게다가 이전엔 쥐어짜도 나오지 않던 사랑스러운 말들이, 부모님에게 남편에게 아이에게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갔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어린아이도 아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선 스스로에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욱이 말해야 한다.

 맘과 정성을 다해 말해야 한다.

오늘도 변함없이  고맙다고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사랑한다고.

이전 04화 바야흐로 자아존중감의 시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