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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프랑스, 나르본의 사진 한 장으로부터

by 숲속의조르바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스페인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자 아늑하고 평온한 프랑스 남부의 땅으로 이어졌다. 빈센트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 아를과 생레미로 가는 동안 교외의 한적한 자전거 도로에서는 느긋하게 휴일을 즐기는 가족들과 제법 많이 마주쳤다. 그러던 중 스위스에서 놀러 왔다는 찬탈이라는 유럽 여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얼마나 여행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다가 찬탈이 선뜻 제안했다.


"혹시 스위스에 오게 되면 우리 집에 놀러 와. 원하는 만큼 재워줄게. 음식도 해줄게~ 물론 다 공짜야~"


그때 몇 가지 생각이 스쳤다.


'한국에서는 천대받던 나의 미모가 유럽에서는 통하는구나. 나는 진즉에 유럽으로 진출했어야 했어..'


'유럽에는 소매치기도 많다던데 그걸 넘어 설마 장기밀매나 납치유인 그런 거는 아니겠지?'


두어 번 이메일로 연락하며 3주 정도쯤 지난 후 스위스 취리히 근처 소도시 빈터투어라는 곳의 찬탈의 집에 도착했고 나의 허튼 생각은 말 그대로 허튼 생각이 되었다. 특히 첫 번째는 더욱 아니었다.


찬탈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둔 아주 화목한 가정의 엄마였고 남편 베쉬는 목사님이었다. 찬탈의 집에서는 사흘을 머물며 삼식이가 되어 아침점심저녁을 얻어먹었다. 내가 차은우의 비주얼도 아닌데 이 글을 보는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이 여간 의아할 것이다.


둘째 날 저녁을 먹고 난 후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주던 중 궁금해서 물었다.


"너는 나랑 5분 정도 이야기한 것이 고작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를 집으로 초대했잖아. 한국에서는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이야. 사실 처음에 너가 집에 오라고 했을 때 내가 매력적인가, 아니면 내가 불쌍해 보이나 하고 생각했어. 아니면 집으로 유인해서 납치하려는 건가 의심했어. 왜 나를 선뜻 나를 초대한 거야?"


나의 농담반진담반에 찬탈과 그의 남편이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다가 대답했다.


"하하. 사실 나 남편한테 이야기나 허락받지도 않고 너에게 제안한 거야. 물론 너가 도착하기 며칠 전 우리 집에 올 것이라는 메일을 받았을 때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말했지. 모두들 좋아했어 "


“난 너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재워주고 맛있는 음식까지 해주고 있잖아. 아무 이유 없이 이런 호의를 베푸는 이유가 궁금해"


찬탈은 한껏 행복한 표정과 손짓으로 이야기했다.


"일종의 리벤지야. 나는 복수를 하고 있는 중이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돈도 하나 없이 무작정 큰 배낭을 메고 유럽을 몇 달간 여행한 적이 있어. 히치하이킹을 하고 기차역에서 잠을 자고, 때론 거리에서 잠을 자고 무작정 걷고 종일 굶기도 하고. 그런데 그때 말이야 처음 보는 사람이 차를 태워주고, 먹을 것을 사주고, 선뜻 집으로 초대해서 잠도 재워주고 했어. 가난한 학생이 여행하는 것을 응원했던 거라 생각해. 그때 나도 너와 똑같은 질문을 그들에게 했었어."


"그때 그들 중 몇 사람이 너도 언젠가 모르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면 된다고. 그러면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때 다짐했지. 내가 누군가를 재워주고, 음식을 내어주고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복수를 할 것이라고. "


"프랑스 여행 중에 만났던 사람들은 다 그 동네 사람들이더라고. 유일하게 너만 외국에서 왔고 스위스를 오게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지. 우리 집에 오면 너도 특별한 경험일 것 같았고 한국인을 만난 적 없는 가족들도 좋아할 것 같아서 초대한 거야. 그리고 사람들하고 어울려서 사진 찍는 걸 봤는데 에너지가 좋아 보였어.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옆에서 봤는데 나쁜 사람 같지 않았어. 분명한 건 잘 생겨서는 아냐 "


확실하게 확인 사살을 한 후 찬탈은 식탁 위의 조명 구조물에 잔뜩 붙여놓은 폴라로이드 사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분명 이 글을 본 당신도 위의 사진을 다시 보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나의 복수의 희생자들!(Victims of my revenges!)"


몇 끼를 먹는 동안 그저 가족이나 친구들의 사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처럼 과분하고 즐겁게 복수를 당한 사람들의 증거 사진이었던 것이다.


복수를 말할 때 세상 행복했던 표정과 미소를 지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찬탈에게 말했었다.


"나도 한국에 돌아가면 언젠가는 꼭 복수를 해볼게"





외국인 여행자가 많이 오는 제주에 살게 되면서 복수를 시전 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이 이루어졌다.

길바닥에 나가서 다짜고짜 외국인에게 재워준다고 하면 내 얼굴을 보고 도망갈 것이 뻔했기에 카우치서핑이라는 여행자들이 현지인 집에 머물거나 현지인괴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서 몇 번의 복수를 했었다. 그 피해자(?)들의 증거사진이다.


독일에서 온 소라와 토마스, 러시아에서 온 라다와 친구, 일본에서 온 마리와 히토미, 스페인에서 온 하비에르, 룩셈부르크에서 온 사만타와 에디타, 러시아에서 온 신혼부부 이반과 케이트, 홍콩에서 온 사내놈 둘 등을 집에서 무료로 재워주고 제주 가이드도 해주고 했었다.


이들 외에 호주, 대만, 중국, 미국, 영국, 캐나다 , 프랑스 등에서 온 서른 명가량에게 복수를 해줬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한다. 대개의 복수는 사이좋게 상대만을 향해서 한 번씩의 순서로 반복된다.


그런데 한 번의 호의가 복수의 호의를 만들어낸다. 찬탈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도 누군가에게 행운의 편지처럼 호의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의 대사가 꽤 유행했었다. 호의를 베풀면 호구가 된다고도 한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좀 있어서 어느 정도 수긍하는 바이나 호의라는 것 자채를 베풀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게 부정적인 인식부터 가지게 하는 것 아닌가 싶다.


한국에는 3대 의무가 있다. 중학교까지 배워야 하는 교육의 의무, 죽어서도 피할 수 없는 납세의 의무, 그리고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방의 의무가 있다.



그래서 문득,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사는 동안 온전한 타인에게 최소 한 번쯤은 조건 없는 호의를 베풀도록 인생의 의무로 부여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번외 편 :

일찍이 한류의 씨앗을 뿌렸더랬습니다.


찬탈의 집에 머문 사흘동안 사춘기 아들인 요나스는 주로 자기 방에 처박혀 있었고 여덟 살 큰 딸 리아와, 여섯 살 막내 샬로미는 내내 나와 놀아주었다. 내가 종이에 몇 자 끄적이는 걸 보더니 신기한 듯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한글에 대해 자랑 겸 설명 조금 해주고 한글로 이름을 써 줬더니 너무 좋아라 했다.


다음날 점심쯤 리아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서 방방 뛰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자랑을 했는데 애들이 너무 부럽다고 종일 자기들 이름도 써달라며 졸랐다고, 그날 자기 인기짱이었다며 종이 뭉치를 내미는 것이다. 샬로미는 미처 자랑할 생각을 못했는지 아차 하는 표정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그다음 날 한껏 자랑을 하고 역시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꼭 15년 전이니, 리아와 샬로미도 어느덧 이십 대 초반의 어엿한 숙녀들이 되었을 것이다. 분명 리아와 샬로미는 중고시절을 K-POP에 빠져 보냈으리라 확신한다. 한류의 확산에 십분 기여를 했다 자부하며 숟가락을 얹고 싶다.



#조선삼식이 #장기는안전합니다 #스위스걸식 #둘리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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