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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을까?

타인의 삶

by 숲속의조르바


집 근처에 장사가 꽤 잘 되는 닭집이 있다. 다른 프랜차이즈보다는 저렴한 가격을 내세워서인지 지나치며 볼 때마다 사장 아저씨는 늦은 밤, 더운 여름날, 추운 겨울날에도 늘 끓는 기름 앞에 서 있었다. 지켜본 4-5년의 시간 동안 같았고, 이전에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고 앞으로도 꽤 한동안 그럴 것이라 예상한다.


분주한 그의 모습을 골똘히 보다가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는 행복하다고 할까?

시간이 흐르고 난 후, 행복했다고 할까?


오랜 시간을 저리 보낸 것에 나중에 후회는 하지 않을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버텨 낼 수 있을까. 그는 분명 성실한 가장일 것이고, 본인의 일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래야만 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직장 생활을 포함해 이런저런 일을 끈기 있게 오래 해보지 못한 의지박약 한 내 관점에서 달인이든, 장인, 분야의 고수까진 아니더라도 한 곳에서 오랜 기간 몸을 담근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그럼에도 ‘할 줄 아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라는 대답은 꽤나 쓸쓸하게 들린다.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게 이것이라서’라며 답하며 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른 맥락이지만 생각나는 것이 있다.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 나름 성공한 동독의 비밀경찰인 비즐러는 반체제 인사 작가 드라이만을 감시하게 된다. 빈틈없고 냉정한 그가 드라이만을 감시 도청을 하면서 점점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삶에 스며들게 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비즐러가 도청을 하다 듣게 된 브레히트의 시 [마리 A. 에 대한 회상]이 담긴 시집을 보기 위해 드라이만의 집에 몰래 들어가 시집을 훔쳐 들고 나와 읽으면서 감동을 받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는 점점 더 그들의 아픔에 몰입하고 공감하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삶과는 완벽히 다른 타인의 삶에 동조하고 임무도 잊은 채 결국은 그들의 중대한 잘못을 덮어 주게 된다.


결국 드라이만의 반체제적 행위를 덮어 주던 비즐러는 발각되고 단순하게 우편물을 감시 분류하는 한직으로 유배된다.


시간이 흘러 독일은 통일이 되고, 자신의 집에서 온갖 도청 장치를 발견한 후 왜 자신은 처벌받지 않았는지 의아했던 드라이만은 자신의 감시 기록 보고서를 찾아보고 난 후에야 자신의 행적들이 HGW XX/7라는 요원에 의해 감춰져 보고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덕분에 잡혀가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를 수소문해 찾았지만 말을 걸지 않고 멀찌기서 바라보기만 한다.


< 영화 타인의 삶 포스터 , 2006 >



이후 드라이만은 이에 관한 책을 출판하면서 책머리에 “감사를 담아 HGW XX/7에게 바칩니다”라는 헌정을 하게 된다. 비즐러는 서점에 붙은 드라이만의 얼굴이 인쇄된 새 책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고 서점으로 들어가 헌정 머리글을 보게 된다. 저 암호 같은 문자를 비즐러가 모를 수는 없다. 드라이만과 그만 알 수 있는 일종의 암호이기 때문이다. 선물 포장을 할 것이냐는 서점 직원에 말에 '자신을 위한 책’이 라 필요 없다 말하던 비즐러의 눈빛은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비즐러는 안정적인 삶을 살았다. 그저 하던 대로 했으면 능력을 인정받으며 순탄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위험을 무릎 쓰고, 안정을 버리면서 택한 결론은 비참하고 보잘것없이 되어 버렸지만, 비즐러는 후회하거나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계나 생존, 나아가 사회적 성공을 위해 신념과 이념을 자기 부정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 젊어서 꽤나 영특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소위 사회적 성공을 이뤘던 사람들이 정치인이 되어서는 나 같은 무지렁이 시민의 상식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언행을 보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살아남고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다는 판단에서 일게다. 그리고 실로 그렇게들 사신다. 역시 똑똑하신 분들이다.


자신을 팔 거라면 기왕 제값 혹은 그 이상의 대가로 교환하는 것이다. 나는 알량한 자존심 하나 팔지 못하며 입으로는 정의를, 눈과 가슴으론 그들을 부러워하는지도 모른다.

뉴스나 인터넷을 보며 정의와 공정을 외치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목청을 높이고 핏대를 세워봐야 결국 돌아오는 건 더 많아진 술값 계산서와 숙취, 나아가 소원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뿐이다. 세상은 바뀌지 않을뿐더러 나의 세상만 참담해질 뿐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해 묵은, 답 없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일찍이, 현재 내 나이 절반쯤의 古신해철은 [나에게 쓰는 편지]라는 노래를 만들었었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계좌의 잔고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내가 이런 노랫말에 위안을 삼아, 결국 다 똑같이 죽는데 뭘 그리 애쓰냐고 하는 모습을 본다면 저 가사에 나열된 어마어마한 것들을 가진 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 분명하다.


"가져보지 못해서 그래"


그래 맞다. 도무지, 도저히 반박을 할 수가 없다.


#타인의삶 #남의것은늘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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