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말의 아이러니

지금은 스물이 넘었을 동네 꼬마들

by 숲속의조르바


우리나라는 한때(?) 동방예의지국답게 다양한 높임말이 있다. 존댓말을 제대로 맞게 쓰려면 상대를 높이는 동시에 나를 낮추기까지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주문하신 커피도 나오시고 음식님도 나오시고 전화도 오신다며 괴상하고 요상하게 쓰이고 있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행위고 뭐고 죄다 지극히 떠받들어야 존대로 여겨지는 어이없는 상황이다.


예전 대리 시절에 외국에서 오래 살다 왔다던 나이도 나보다 많고 직급도 높은 과장과 함께 본부장 주재 회의를 했을 때 "00 과장이 이러이러한 점을 지적했는데 00 과장 생각과 다르게 저는 이런 것이 문제라 생각됩니다"라는 말을 했는데 회의가 끝나자 그 과장이 씩씩거리며 나를 불러내곤 자기를 왜 [과장님, 뭐뭐 하셨다]라고 존대 안 하냐며, 맞먹느냐며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했었다.


압존법을 아무리 설명해도 그는 이해를 못 했고, 결국 다른 직원 몇 명을 불러 예문까지 들며 이게 맞느냐 틀리느냐 확인을 했고, 그제야 오해 아닌 오해를 풀 수 있었다. 그가 외국에서 오래 지낸 이유가 아니라 제대로 배우지 못한 탓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요즘 이 압존법을 제대로 쓰는 젊은이들을 본 적이 드물다. 그냥 모든 존재를 떠받드는 표현을 쓴다.


저렇게 엉터리로 존댓말을 쓴다 해서 존댓말 자체로 큰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반말의 경우는 심히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반말은 온순한 사람을 발작시키는 방아쇠가 된다. 나이도 어린놈이, 혹은 나이차가 한참 나는 나이 든 사람이 먼저 반말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언제 봤다고 어디서 반말이냐며 순한 양을 야수로 돌변시킨다. 이런 경우는 아주 흔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알 것이다


반면 새로 관계를 맺거나 관계가 지속되는 사이에서 말을 놓지 않는 경우를 [거리 두기]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남자들의 경우 나이를 묻고 바로 말을 놓는 일이 허다하다. 예의 없던 반말이 친근감이나 거리가 좁혀진 척도가 되는 것이다. 반말의 아이러니이다.


반말의 아이러니를 생각하다가 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나는 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낯선 할머니들과도 잘 어울렸었다. 할머니들에게 은근슬쩍 반말을 섞어 이야기하기도 했다. 착각인 줄 모르지만 오히려 친근해하시는 것 같고 편한 느낌도 들었다.


‘생판 모르는 어린놈이, 내 손주도 아닌 놈이 감히 반말을 해?’라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그나마 말을 걸어주는, 대화를 해주는, 나를 상대해 주는 사람이라, 그리고 한 때 품에 있던 손자나 자식이 생각나서 그들로 여겨 반말을 받아 주셨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 궁리해 보니 내가 당신들만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동네 꼬마든 누구든, 반말이나 존댓말 뭐든 따질 것 없이 한마디라도, 인사라도 건네주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 생각만 해도 벌써 쓸쓸해진다.



"아스크림 먹고 싶쪄?"라고 놀리듯 말을 건넸던 저 꼬맹이들도 지금쯤은 아마 대학생이 되었을듯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