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타 아치스캐년, 세상 가장 낯선 풍경에 서서
"낯선 것은 불편하지만 매혹적이다.
삶을 익숙한 것과 낯선 것으로 채운다면 황금분할은 어떤 것일까”
- 은희경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중-
아주 오래전 읽었던 소설집의 한 단편 중에 나온 저 구절은 꽤나 오랫동안 내 뇌리 속에 박혀 있다. 물론 그가 궁금해했던 비율과 분할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낯설고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매혹적이던 그 무엇도 (사람, 장소, 일, 음식 등등) 빈도가 더해지면 익숙해지고 권태로워진다. 물론 작가는 권태의 힘에 대해서도 아래처럼 아주 분명하게 짚어 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견디기에 가장 어려운 것은 불행이 아니라 권태야. 하지만 사람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에 현상을 바꿀 의지 없이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되는 것이 권태의 장점이지.”
저 문장에서 [사람] 대신에 장소나 일 등을 대입해도 같다. 모든 매혹이 사라진 현재를 권태의 장점으로 버텨낼 것인지, 새로운 매혹을 찾아 나설지 고민이 이만 저만 아니다.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참 어렵다.
일상은 익숙하다. 빤한 일상은 지루함과 동시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순조로운 일상은 평범함으로도 종종 대치된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부분이다.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고 류시화 시인은 노래했다. 낯선 것을 찾는다는 것은 익숙함을 밟고 서 있는 이유일 것이고, 익숙할 것을 찾는다는 것은 불안정의 한계에 다다라서 일 것이다.
나는 가진 것 하나없이 허투루 빈 들녘의 바람들을 좇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솟는다. 그러는 동시에 이중적이게도 온전하고 단단한 안정을 내심 기대하고 바랬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감히 가져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해 도망다닌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항상 새로운 것만 찾아서, 낯선 것만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불안정의 칼날에 선다.
아무리 멀고 낯선 여행이라고 해도 결국 안정적인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언제든 든든히 돌아갈 곳이 있기에 여행이 성립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이가 더 들어갈수록 분명 시소의 방향은 익숙함이 많은 쪽으로 기울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것들을 기웃거린다. 이를 스스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 호기심이나 두리번거림 마저 사라진다면 꽤나 슬플 것 같다.
나이가 더 들어가도, 힘이 더 빠지더라도 제발 익숙함이나 권태에로 스스로 침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