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취업준비를 돕는 회사를 통해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작은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서 나에게 독일에서의 삶은 어떤지에 대한 질문이 있었고 나는 내가 13년 독일에서 살아가면서 느꼈던 몇 가지를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독일에서의 삶은 어떤지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써보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
얼마 전에 유튜브를 통해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였다. 거기에서 많은 청년들이 자신도 저녁이 있는 삶을 원하고 그러기에 워라벨이 좋은 회사를 취직하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어떤 이들은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만의 삶을 찾는 청년들도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이 한국에서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나는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얼마 전 독일에서 함께 알고 지내던 어떤 분이 독일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밤 9시에 출장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에게 전화를 하는 일도 있었다. 저녁이 있는 삶을 동경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때 내가 만약에 나중에 한국에 들어가서 일을 하게 되면 난 과연 잘 적응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독일에선 저녁이 있는 삶이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한지 이제 7년이 지났다. 그동안 회사 동료들과 업무시간 이외에 만나 함께 식사를 했던 경우는 정말 10번도 채 되지 않는다. 혹 팀원 간에 교류를 위해 또 팀을 더 돈독하게 하기 위한 행사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업무시간에 즉 어떤 날을 잡아 워크숍과 같은 형태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독일 회사에서는 12월 크리스마스 이전에 부서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를 위해 회사에서 부서별로 예산도 따로 책정되어있다.) 이 크리스마스 파티도 어떤 정해진 날에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진행되는 경우가 많고 오후에 행사를 진행하더라도 어떤 행사이든 저녁 9시나 10시를 넘기는 경우는 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다. 회식이 없다는 것을 빼더라도 회사 업무 역시 대부분 저녁 5시에서 6시 이전에는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고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자동차 회사는 저녁 7시 이후에는 공장 내에 생산라인을 제외하고는 일반 사무실에는 머물면 안 되거나 필요시에는 팀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기에 독일에서는 저녁시간이 넉넉하다.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조금 일찍 퇴근한다면 개인적인 업무 (의사를 방문하거나 은행 창구에서 필요한 업무 등)도 해결할 수 있다. 독일은 모두가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몇몇의 커다란 식품점을 제외하면 일반적인 가게들부터 커다란 쇼핑센터까지 대부분 저녁 8시에 문을 닫는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저녁이 있는 삶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시간 예약의 굴레
독일에 살면서 배우지 않았어도 저절로 알게 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Termin(테 어민)이라는 단어이다. 이는 우리나라 말로 시간 예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독일은 한마디로 이 테 어민... 시간 예약의 나라이다. 살아가면서 필요한 정말 많은 일들 거의 대부분이 이 시간 예약 없이는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병원 진료부터 이사한 주소지 등록, 비자 발급 등 독일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며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들에는 반드시 시간 예약을 먼저 해야 한다. 사실 시간 예약을 하고 업무를 처리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평범하게 이루어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병원에 예약을 하고 찾아가고 여러 가지 일들에 시간 예약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독일에서 살아가며 조금 답답한 건 이 시간 예약이 때로 정말 어렵다는 점이다. 전에 어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비자를 받기 위해 외국인 관청에 전화를 걸어 시간 예약을 하고자 했는데 정말 여러 번 전화를 했는데도 시간 예약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자 만료일은 다가오고 답답한 마음에 그 관청에 직접 찾아가 무작정 기다리다가 기회를 얻어 창구에 가서 드디어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 직원이 시간 예약이 없이는 자신들은 어떤 업무도 처리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인이 자신이 예약을 하기 위해 정말 여러 번 전화를 걸었는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고 사정을 설명하자 그 직원이 그렇다면 연결이 될 때까지 시도했어야 한다고 말하고는 그 지인을 돌려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이런 경우가 자주 있는 일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독일 생활하며 이 테 어민... 시간 예약과 관련하여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나 역시도 이전에 병원 진료를 위해 시간 예약을 하고 그 시간에 맞추어 병원에 갔지만 대기실에서 2시간 넘게 기다린 경험이 있는데 그때 대기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며 이렇게 기다리게 할 거라면 과연 시간 예약은 이 병원에서 무슨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제 조금 독일 생활이 적응되어 무슨 일을 하던 시간 예약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자연스럽게 내가 가고자 하는 곳 내가 업무를 봐야 하는 곳에 전화를 걸게 되었다. 그러나 가끔 혹 시간 예약을 하지 못했더라도 내가 필요한 일을 처리해주고 도와주는 우리나라의 융통성이 그립기도 하다.
인내, 독일 생활의 필수 덕목
기다림... 인내는 독일을 살아가는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독일은 아주 많은 부분에서 일처리가 많이 더딘 편이다. 더디다는 것이 그 일이 처리되는 과정과 결과까지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느리긴 하지만 업무의 처리나 그 결과는 굉장히 만족할만한 경우가 많다. 다만 우리나라의 빠른 업무처리를 경험하고 독일에 온다면 처음엔 독일의 속도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다. 처음 유학을 나와서 집을 구하고 내 방에 인터넷을 설치하기 위해 인터넷 회사에 인터넷을 신청했는데 선을 연결하고 인터넷을 설치해주는 설치기사가 3주 후에 내 방에 온다는 통보를 받았다. 당시에는 스마트폰도 없었던 시기였기에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고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정말 많이 불편했는데 인터넷이 설치되는 데에 3주의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경험했을 땐 정말 충격이었다. 직장에 들어가고 자동차를 구입하여 타고 다닌 던 때에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당시 누구의 과실인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상대 보험사와 내 보험사가 서로 여러 의견을 주고받고 최종적으로 누가 몇 퍼센트의 과실을 가지고 그 과실을 바탕으로 차량 수리는 누가 어느 정도의 수리비를 담당하게 되는지 결정되는 데까지 무려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최종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나는 차를 고칠 수 없었다. 내가 답답한 마음에 수리를 했다가는 그 수리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이 처리되는데 수일에서 또는 수개월이 걸린다. 이제 이런 독일의 시스템에 적응이 되었는지 가끔 내가 의뢰한 어떤 일이 며칠 걸리지 않아 처리되면 기분이 좋아지기도 한다.
나는 처음 독일에 나올 때 부모님께 이제 독일에 들어가서 유학을 하면 거기서 일을 하며 살면서 살 거다 라고 말했다. 그만큼 나는 독일에 나오기 이전부터 독일에서의 삶을 생각했고 지금은 계획했던 대로 독일에 자동차 회사를 다니며 독일에 살아가고 있다. 이미 나오기 이전부터 독일에 살아갈 생각을 했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는 여러 가지 단점에도 난 독일에서의 삶이 좋다. 때로는 주변에 사람들이 독일이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이야기할 때도 있다. 위에 쓴 것처럼 대부분의 상점이 저녁 8시면 문을 닫고 한국에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것들도 사실 독일에는 없다. 겨울이면 저녁 5시만 되어도 캄캄하고 날씨도 매일 어둑어둑한 하늘이 계속되면 마음이 우울하고 삶이 재미없다 느껴지는 것 같다. 나도 독일의 삶이 재미없다 이야기하는 이들을 그래서 공감하고 이해한다. 그런데 난 그래도 독일에 살아가는 것이 좋다. 때론 단조로운 것 같지만 그 단조로움 속에 평안함과 여유가 있고 느릿느릿 흘러가는 상황 속에서 내가 충분이 더 생각하고 좋은 결정을 내릴 시간이 주어진다. 도시에 살고 있지만 조금만 둘러보면 걸어 다닐 만한 많은 산책길을 만날 수 있고 무뚝뚝한 것 같아 보이는 독일 사람들은 알고 보면 외국인인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늘 도와줄 준비가 되어있는 순수한 사람들이다. 독일이란 나라를 이야기하며 어떤 이들은 이제 독일이 세계적으로 그 힘을 잃어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독일의 제품 그중에서도 최고였던 자동차는 전기자동차 시대로 넘어오며 미국이 더 우수하다 말하고 독일의 인터넷 속도는 우리나라 2000년대 초반 수준?이라고 말하는 기사도 본 적 있다. 그러면서 독일이 선진국가로서 그동안 보여준 강한 면들이 점점 약해진다 말하는 것 같다. 어느 정도는 맞다고 나도 생각한다. 그러나 여전히 독일은 안정된 정치와 사회를 지키고 있고 독일의 기술이 이제는 세계에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고 경험하는 독일의 기업들은 그들이 만약 정말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지 않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더 나은이들에게 배우고 발전시켜 언젠가 다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낼 기업들이다. 나는 아직도 이런 독일에 살면서 보고 경험하고 배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