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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인킴 Sep 20. 2022

나의 첫 정신병원 방문기

추락한 천사

막내이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막내이모: 너희 엄마가 도라지 20kg를 말도 없이 보냈어. 이 많은걸 어째?

나: 네?! 엄마 조증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나보네요. 저한테는 2주째 통 연락이 없으세요.

막내이모: 그래... 도라지 보내고 나한테는 전화가 왔는데 내가 시큰등하게 반응하니까 또 끊어버렸어. 아무튼 이걸로 배도라지즙이나 만드려고 하는데 50포 16상자쯤 나올 것 같아. 애들하고 같이먹어볼래?


2주 전, 추석을 앞두고 치달은 엄마의 조증은 다행이 큰 이벤트를 동반하지는 않았지만 씩씩하게 잘 살아보려는 내 얼굴에 던져진 지독한 과거의 올가미였다. 그 올가미는 마치 이렇게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설마 이걸 잊은 건 아니겠지? 어디 혼자만 잘 살려고? 이기적인 년. 네 현실은 바로 이거야.'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이자 가정폭력배였지만 엄마는 최선을 다했다. 아빠가 만취해서 들어와 집안의 물건을 부수고 엄마를 때리며 난동을 부릴때면 엄마는 나와 여동생을 데리고 밤새 몸을 피해있었다. 여관을 가기도 했고 절간에서 밤을 새기도 했다. 이따금씩 엄마는 몇 달간 집을 비웠다. 아빠는 엄마가 우리와 몰래 통화하지 못하도록 전화선을 뽑아놓고 집안일을 해주기 위한 파출부를 데려와 같이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방학이 되면 엄마는 동생을 데려갔고 나는 이 집 저 집에 맡겨진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절대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에게 악마는 아빠 하나로 족했다. 천사가 필요했다. 엄마는 천사였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고부터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했다. 중매쟁이와 시댁에게 속아 결혼 사기를 당했고 신혼부터 본색을 드러낸 주사는 아이를 둘이나 낳아도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별거했고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산에 있는 외할머니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몇 년 후 이혼했고, 나는 그들의 이혼계약?에 따라 고등학교 입학은 아빠가 있는 마산에서 했다. 지옥같은 곳에서 딱 한 학기를 다니고는 다시 엄마가 있는 부산으로 보내졌다. 아빠가 암에 걸린 것이었다. 아빠는 곧 간암으로 죽었다.


악마가 사라졌으니 이제 우리 가족은 행복해야했다. 아빠만 없으면 내 인생에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내 인생은 살만해졌다. 고등학교를 문제없이 졸업했고 대학생활도 재미있게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아마 아빠의 가정폭력으로 인한 우울증이 먼저 왔고, 언제부턴가는 조증과 우울증을 오가는 조울병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내가 엄마의 조울병을 심각하게 인지하게 된 것은 최근 2~3년이었다. 되짚어보니 내가 바쁘게 20대를 사는 동안 엄마는 계속 이 병을 앓아왔다.


추석때 계획한 가족모임이 무산됐지만 동생에게 명절밥이라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비빔밥과 잡채를 해먹으며 동생이 겪은 엄마와의 에피소드와 내가 겪은 것을 모아보니 조각이 맞춰졌다. 술을 못하는 엄마가 과음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던 일, 밤새 잠도 안 자고 돌아다닌 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서 여기저기 퍼나르던 일, 어디서 돈이 생겼다며 금은방에서 발찌를 사 준 일, 그러다가도 한 순간에 고꾸라져 잠수를 타는 패턴... 몇 번이나 엄마에게 함께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엄마는 줄곧 거부했다. 요즘은 조증 일 때도, 우울증일 때도 정상적인 대화가 이어지지 못다. 조증과 울증 사이에 놓이는 정상시기가 이젠 거의 없다. 엄마의 원망 대상은 아빠가 죽고난 이후 우리 자매에게로 옮겨진 것 같았다. 조증이 극에 달하면 우리에게 모진 말을 쏟아냈다.


나는 당장 서점에 가서 <조울증은 회복 될 수 있다>와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사왔다. 추석 연휴동안 국내 작가가 쓴 조울병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절실하게 읽어나갔다. '왜 이제야 엄마를 도울 생각을 하게됐을까'하며 자책하기도하고, '결혼해서 애들도 낳고 이제 정상적으로 잘 좀 살아보나싶었는데 참 쉽지 않다'는 좌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오늘 막내이모의 전화를 받고 드디어 마음을 먹게 된 것이었다. 생각만 하지말고 일단 뭐라도 해보자고. 우선 가족관계증명서를 뗐다. 그리고 옛날에 엄마가 입원한 적이 있었던 정신의학과 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사: (접수대에서) 이름이요?

나: ooo이요. 제 어머니세요.

간호사: 무슨 일이시죠?

나: 엄마가 이 병원에 다닌 적이 있는걸로 기억해요. 조울병이 있는데 병원 진료를 거부하세요. 제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간호사: 잠시만 기다리세요.


진료실에 들어가니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성 의사가 앉아있었다.

의사: 거기 앉으세요. 따님이시군요. 큰 딸?

나: 네, 큰 딸입니다.

의사: (진료기록부를 살피며) 어머님은 2011년에 여기에 입원하셨어요. 그러고 띄엄띄엄 통원 치료를 몇 번했고요. 2013년이 마지막 진료기록이네요. 지난 9년간 어머니는 어땠나요?

나: 계속 조울병 증상이 있었지만 일상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 2~3년간은 일도 그만두고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있어요.

의사: 병원에 가자고 해보셨나요?

나: 그럼요. 그럴 때 마다 동문서답을 하거나 화를 내세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의사: 그럴테죠. 대게 그래요. 그래도 어떻게든 모시고 와야해요.

나: 가족의 동의 하에 강제 입원이 가능하나요? 절차가 어떻죠?

의사: 요즘은 그런 식이 흔하지 않아요. 타인이나 본인에게 신체적 상해를 일으킬 만한 위험 정황이 있을 때 경찰의 대동 하에 진행되는 일은 있지만요.

나: 그런 일이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요?

의사: 그럴 수는 없죠. 극단적인 상황에 다다르면 때가 늦을 수도 있고요. 어떻게든 모셔오는 수 밖에요. 병원에 오기만 하면 의사의 진단하에 당장 입원이 가능합니다.

나: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는 입원 시 준비물이 프린트 된 안내장을 줬다. 수납은 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뿌연 안개가 조금은 걷혀진 느낌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잊고 살고싶은 기억들이. 아빠의 퇴근이 늦어질 때면 오늘도 만취해서 들어오는게 아닐까 조마조마하던 심장. 그게 맞다면 당장 엄마를 따라 도망 갈 수 있도록 책가방을 챙기고 양말을 신고 잠자리에 누워야했던 날 밤의 기억들. 아빠의 죽음으로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던 무력한 불안감이 재생된다.


엄마가 전화를 받을까? 지금은 조증일까 울증일까? 병원에 가자고 하면 화를 낼까? 또 어떤 원망을 퍼부을까? 엄마가 하는 말에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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