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린다는 은율이, 노트를 다 썼다며 바꿔 달랬다. 여덟 살 때와의 그림과는 또 많이 달라진 형태에 신기해하며 한 장 한 장 넘기는데, 마지막 페이지에서 두 줄의 글을 발견했다. '준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모른 척해야지.' 도곤 도곤. 참 은근히도 설레는 문장이 고나.
아홉 살 소녀에게 사랑이 왔다. 누군지 알고 관심이 있다는 것도 알긴 했는데, 저렇게 노트 한 귀퉁이에 은밀히 감정을 털어놓을지는 몰랐다. 귀여운 것. 꽃이 피기 전, 그니까 새 학기 시작하고 며칠 안 지나 등굣길에 말한 적이 있다. 준이라는 애가 있는데 무척 귀엽다고. 친해? 물으니 말을 했긴 했는데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라고 하길래 인생의 선배로서 스킬 하나를 노나 줬다. 딱 봐도 견적 나오잖아 이건. 그럼 너가 먼저 다가가서 말도 걸고 장난도 치고 해,라고. (그리고 널 좋아하게 만들어)
준이가 정말 좋아하게 된 건지 어떤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학교가 끝나면 그녀는 매일같이 놀이터에서 그와 논다. 다다다 달려서 개미 행군을 관찰하고 다다다 달리며 얼음땡을 한다. 며칠 전 엄마 단톡 방이란 것이 생겼다. 거기서 축구 아니면 숲 체험을 하자는 제안이 나왔는데 여자 친구 엄마들은 거의 태반, 숲을 택했다. 하지만 나는 알지. 은율이가 뭘 원하는지. 일단 내 마음대로 축구로 정했다. 물어보고 싫다 하면 바꾸면 되니까. 집으로 걸어오며 은율에게 물었다. 이러이러한데 너는 축구랑 숲 중에 뭐가 좋을 것 같아? 그러자, 은율이 물었다.
- 준이는 뭐 한대?
- 축구
역시. 예상은 적중. 오늘 그녀는 축구란 것을 처음 한다. 아마도 그녀의 첫사랑과 함께. 하앍하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