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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러 Sep 24. 2021

엄마란 뭘까

내게 주어진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목표와 실적을 행한다고 할 때, 딸이 반 이상의 영향력을 끼친다. 나는 그녀로 하여금 영감을 얻기도 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한다. 한없이 늘어지고 싶을 때 자세를 고쳐 먹게 만드는 것도 딸이다. 얘도 해야 할 일을 하는데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은 것이다. 어째 본보기가 뒤바뀐 느낌이지만 좌우간 그렇다.


육아라는 명목은 글쓰기의 주요 소재가 되어 주고 있으며 딸의 드로잉 테크닉은 sns 유지에 있어 부캐의 개념으로 자리 잡혔다. 어제도 딸과 나는 분주했다. 딸은 내 지시에 따라 원하는 그림을 그려줬고 어린이만의 귀여운 글씨체로 문구를 써 주었다. 잘 되든 안 되든 뭐라도 하려는 포부는, 딸의 스킬 덕분에 견고해지고 당차지는 것이다. 때때로 울그락 불그락 감정의 기조가 널뛰기를 해 서로 삐치기도 하지만 대체로 우린 죽고 못 사는 모녀다.


도서관에 갔다가 마트에 들려 장을 보고 그 김에 가장 좋아하는 제품의 커피우유를 샀다. 내 거만 사자니 걸려 딸기우유도 샀다. 가뜩이나 쨍하니 더운데 별로 산 것도 없이 무거워진 가방에 집으로 걸어올 때는 좀 툴툴댄 것도 같다. 애가 학원 간 시간반의 여유 동안 하고자 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집에 오니 멕아리가 풀려, 대충 장바구니 풀고 커피우유 홀짝이며 빌려온 책을 펼쳤다. 안희연 시인의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계절과 찰떡이라 더 눈이 갔을 시집이었는데 내용은 예상과 달리 꽤나 묵직했다. 시는 창작의 끝이라 생각해온 작가 지망생의 사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이. 나의 사유는 곳곳에서 용솟음쳐 올랐다가 어렵사리 마지막 장 시인의 말에 다다랐을 때 마침내 멈추어졌는데 그것은 또한 '엄마'에 대한 새로운 상념을 불러냈다.




"도와주세요. 엄마를 잃어버렸어요." 새벽 두세 시쯤, 잠결에 아이 목소리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잘못 들었나. 잠시 고민하는 사이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아이 목소리가 한번 더 들려왔고 누군가 밖으로 나가 아이를 데려가는 기척이 들렸다. 아이는 왜 하필 그 야심한 밤에 엄마를 잃어버린 걸까. 사람들에게 간 밤 일을 이야기하자 모두들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가위눌린 게 분명하다고 했다.


한 달쯤 뒤에 나는 이 미스터리의 답을 찾았다. 어느 저녁, 목소리를 다시 들은 거였다. "엄마 보고 싶어"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목소리. 나는 집 안의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목소리의 출처를 찾았다. 맞은편 주택 3층이었다. 창에는 두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우는 아이를 달래며 옷을 갈아입히는 중인 듯했다. 아이와 함께 있는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결코 아이를 다그치지 않았고 조곤조곤 속삭이며 옷을 벗기고 입혔다. 모르는 게 맞고 알 수도 없을 테지만 알 것 같았다. 아이의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혹여 오더라도 아주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서글픈 직감이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신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상상을 한다. 여름 언덕을 오르면 선선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흩날린단다. 이 언덕엔 마음을 기댈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없지만 그래도 우린 충분히 흔들릴 수 있지. 많은 말들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동안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고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도 같다. 울지 않았는데도 언덕을 내려왔을 땐 충분히 운 것 같은 느낌도 들고.

-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엄마란 뭘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학원 마칠 시간. 칼 같은 딸의 전화. 여보세요 하자마자 오늘은 학원에서 뭘 만들었는데 선생님이 어쩌고- 말이 끊이지 않고 쏟아졌다. 어어 그래, 엄마가 딸기우유 사놨으니까 얼른 와. 집에 와서 얘기해줘. 딸이 신난 목소리로 답했다. '예에! 나 딸기우유 진짜 먹고 싶었는데. 뛰어 갈게!'


날씨 더우니까 뛰어다니지 말라고 그르케에 말했건만 뛴단다. 딸기우유 먹고 싶었다는 거 핑계란 걸 알고 있다. 너에게 엄마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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