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설 때 오락가락하던 비는 볼일을 본 후 지하보도에서 나왔을 때 매우 세찬 비바람으로 변해 있었다. 때문에 우산 정중앙과 맞닿은 정수리 부분을 제외하고 온 몸이 쫄딱 젖었다. 그러나 이러한 바깥 사정을 알 리 없는 남편과 딸은 현관에 들어선 나를 보고도, 두 시간 전 집을 나섰던 상황과 1도 다름없이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남편은 아래에서 위로 누워 게임을 하고, 딸은 위에서 아래로 누워 유튜브를 보고 있는... 아 한 마디씩 하긴 했다. '왔어?' 이 잉간들을...
옥수수 삶아지는 냄새를 솔솔 맡으며 딸과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며 놀았다. 갑자기 상황극을 하거나 영상을 같이 보면서. 둘이 그렇게 놀다 보면 소외당한 남편이 들이닥치는데 셋이 되면 놀이의 주종은 바뀌기 마련이다. 딸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일명 햄버거 놀이. 남편 위에 딸, 딸 위에 내가 누워 통통통, 눌러 재끼는 것이다. 한 명이 죽어 나가야(보통 남편이) 끝나는 이 게임은 고통과 즐거움이 절묘하게 뒤섞인 비명을 동반하는데, 악의 본성인지 뭔지 하여튼 간에 맨 위에서 짓누를 때 쾌감이 쏠쏠하다.
저녁엔 삼겹살을 구워 갖은 채소와 함께 넣고 끓인 라면 요리를 남편이 해줬다. 솔직히 매우 짰는데 열라 맛있다고 쌍따봉 날려주었다. 칭찬이 기분 좋았는지 음식을 다 먹어갈 무렵에는 후식으로 모히또를 만들기 시작했다. 깻잎과 레몬즙으로 어설프게 흉내 냈던 과거는 잊어라. 세상에 마상에 이번엔 라임과 애플민트가 들어간 진짜 모히또입니다. 남편의 야심만큼 맛도 좋았다. 내가 안 만들어도 된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개꿀인가. 감동인 건 어떻게 한다? 찍어야지요. 완성된 음식을 찍는다는 건 만들어준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거니까.
어제보다 좀 더 나은 모히또. 평일과는 다른 한량의 주말. 아무 할 게 없다는 사실은 때때로 굉장한 기쁨을 준다. 여름 비라고만 생각했던 종일 내린 비는 기상예보를 들으니 가을의 장마라고 했다. 이렇게 가을을 맞이한다고? 이제 여름방학도 막바지다. 늘어질 대로 늘어질 수 있는 보통의 하루가 참 달다.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종류의 함정이 있어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몸을 웅크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루하루 아무 일 없이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