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흰 베개를 두드리며 여기에 그림을 그려 보라, 딸에게 청했다. '싫어요, 후회하실 거예요!' 하면서 딸은 완강히 거부를 했는데 어머님도 쉽게 물러서진 않았다. 굳이 하얀 베개에 왜? 것도 그리다 망치면 어쩌려고, 라 생각하는 손녀와 아무렴 어때? 네가 그린 그림 매일 보고 싶어, 라 생각하는 할머니와의 대립. 결과는 다행히, 보는 내가 민망하지 않게 딸의 수락으로 끝이 났다.
부모님의 '더 있다 가'에 발이 묶였다. 딱히 할 일이라곤 없어 쉬는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래도 내 집이 제일 좋으니 그만 가고 싶었는데 점심엔 콩국수 해서 같이 먹자는 말씀에 차마 일어서질 못했다. 어머님은 요리에 진심이나 마음만큼의 재능은 없으시기에 좋아하는 메뉴임에도 전혀 기대가 안 되었다는 게 현실이지만.
아, 과연. 콩국수도 비벼 먹나요오? 요상한 비주얼의 콩국수 앞에서 나는 뜨악했고 남편은 철없는 애처럼 핀잔을 줬다. 그리고 역시 아버님은 이렇다 할 말씀 없이 젓가락을 드셨다. '난 생전 반찬 타령 안 해. 김치만 줘도 암 말 안 했어.' 일전에 들었던 아버님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여하튼 생각보다 콩국수는 먹을 만했다. 물론 입 짧은 딸은 거들떠도 안 봤지만 다들 한 그릇씩 싹 비웠다.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거봐 내가 맛있다고 했잖아.'
떠나오기 전 어머님께 말했다. 덕분에 잘 먹었다고, 날도 더운데 하시느라 고생하셨다고, 다음엔 저희가 먹을 거 다 사 오겠다고. 그랬더니 쓸데없이 돈 쓰지 말고 그냥 오란다. 그... 그게. 나는 다시 외쳤다. 에이 아니에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이것은 으레 하는 격식인가 아니면 나의 본심인가.
어쨌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을 때 남편은 타박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어머니 음식에 토 달지 말라고. 애도 아니고 뭔 투정을 그리 하냐고. 가끔만 요리해서 생색내는 너는 모른다. 삼시세끼 차리는 게 을마나 뒌 일인지.
딸은 모기에 엄청 뜯겼다. 하필이면 발바닥과 코 정중앙을 물려 가려워 미치는 게 안돼 보이면서도 웃겼다. 그림 그리기 각축전의 연장선인지, 이번에는 모기약을 발라야 한다는 남편과 바르기 싫다는 딸의 전쟁이 시작됐다. 약 바르면 따가워서 싫다는 어린이와 안 그러면 간지러움이 오래가서 발라야 한다는 어른이의 싸움. 에휴 결국, 히히덕거리며 쫒고 쫒던 상황은 딸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는 대서사극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다.
목욕을 마친 딸의 머리를 말려주며 삐친 소녀의 마음을 달랬다. 아빠는 어쩌고 저쩌고 울분이 계속되어 마음을 삭히는데 오래 걸리긴 했으나 어느 정도의 감정은 일단락되었다. 지나가듯 한마디 보탰다. 너는 모기 물렸다고 아플까 봐 약 챙겨주는 아빠도 있고 좋겠다. 엄마는 학교 다닐 때 아빠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너. 나의 아빠는 살아 계실 때 모기약을 발라 주었었나? 기억에 없다. 하지만 부재란 늘 그렇듯 막연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밤에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언제나 가운데를 차지하는 딸이 가장 예쁨을 받는 시간. 남편과 나는 딸의 볼을 하나씩 나눠 가지고는 뽀뽀를 일삼았다. 요게 요게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 아빠한테 반항을 하고 말이야. 그런 말을 건넬 때 딸은 신서유기의 꼴뵈기 시르미 표정으로 화답을 했다. 내일은 진짜 우리 어디 좀 가자. 남편은 의견을 내면서 폰으로 장소를 물색했다. 셋이 함께 지낼 수 있는 휴일이 하루 더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쁠 일인가.
있어서 좋은 것들이 참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