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학원 가려고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딸이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 나는 어떻게 생긴 거야?' 홈드라마의 여느 장면처럼 그렇게 똑같이 말이다. 엘리베이터 안에 아무도 없을 리가 없지. 나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묻는 거 뻔히 보였으니까. 사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고딩스런 남자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말을 들었겠지만 당연히 미동 없이 핸드폰만 보았다. 욘석 보게. 그래서 나는 답 대신 다시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기다렸다는 듯 답한다.
- 아, 그거, 여자의 난자와 남자의 정자가 만나서 수정인가 뭔가 그걸 해가지고... 그게 점점 커지면서 아기가 되는 거지. 염색체 뭐 그거, 여자가 xx고 남자가 xy인가 뭐 어쨌든...
아홉 살 딸은 요즘 남자와 여자의 다름, 사귀는 것, 몸의 변화.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졌다.
마흔 중반의 애엄마지만 이런 청춘 멜로물 좋아한다. 사진은 <알고 있지만>이라는 드라마인데 여기 나오는 주인공 '유나비'와 '박재언' 와. 진짜 이들. 이 사람들은 이 세상 비주얼이 아니다. 뭘 해도 이뻐 보이는 게 청춘인데 외모까지 이르케 열일하기 있는지.
이상과 현실엔 경계가 있고 누가 봐도 이 세상 비주얼인 보통의 외모 나에게도 연애의 철칙이란 건 있었다. 유나비가 첫 눈에 빡 꽂혀버린 박재언 같은 외모의 남자는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아마 그래서 더) 사귈지 말지 결정할 때에는 반드시 가설에 대입했었다. 내가 저 남자와 키스할 수 있을 것인가. 뽀뽀가 아니다. 키스다.
사랑은 유한한가? 그렇다고 믿고 있다. 단지 불씨가 다를 뿐이다. 화력이 쎄든 은근하든 다 타면 재가 되긴 될 텐데 아직 불씨가 남았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냐면, 남편의 귀를 파주는 데 있다. 온갖 먼지를 귀로 먹는지 한번 팔 때마다 코딱지 만한 귓밥이 나오는 남편은 나의 허벅지에 누워 귀를 맡길 때 세상 평온한 표정이 된다.
키스를 해도 괜찮을 것 같은 남자와 결혼해서 16년째 그의 귀를 파주는 나에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요즘 애들은 참 빨라, 라는 말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딸이 '나는 모쏠이야'라고 할 때는 그런 것도 같다. 코로나 시국이라 교실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있어 서로의 벗은(?) 얼굴을 볼 일이 별로 없고, 대화조차 금기시되어 친해질 일도 많지 않을 텐데, 2학년 반학기 동안에 딸은 벌써 좋아하는 남자애가 여러 번 바뀌었다. '엄마 나 좋아하는 애 생겼어.' 그럼 나는 나도 모르게, 또?라고 되묻고 마는 것이다.
딸이 어떤 사람을 만나건 간에 이상형의 기준만은 스스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게 키스가 궁금해지는 남자든 귓밥을 파줘도 드럽지 않을 남자든 그 어떤 다른 것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격해. 연애는 쟁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