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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30. 2022

어둡고 열렬한 음악 선물

이국에서 만난 작곡가와 작가가 온 마음으로 말하고 듣다

무대에 오른 이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었는데,

격식을 차린 건 아니다. 피아노 연주자는 7부 블라우스에 바지, 아쟁 연주자는 면 트레이닝 복, 타악기 연주자는 적당히 붙는 티셔츠 차림, 지휘자는 칼라 셔츠에 워커를 신고 레몬빛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모습. 마지막에 등장하는 작곡가는 터틀넥 니트 원피스 끝자락을 펄럭이며 깊게 절한다.

이곳은 프라이부르크 음악대학. 나는 작곡 석사과정을 졸업하는 유소정의 음악을 들으러 와 있다. 45분 동안 5곡이 연주되는 이 공연에서는 음표보다 목소리가, 대답보다 질문이, 즐거움보다 고통이 선명하다. 연주, 청중, 조명, 음향까지 대부분 여자들의 협업이라는 것도 두드러진다.


31개의 스피커들을 모은 설치 작품 < 그건 칭찬이 아니야 >를 감상하려면 좀 움직여야 한다. 조금 떨어져 서면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들이 한데 뒤엉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스피커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면 비로소 알 수 있다. 이것들이 생생한 증언이라는 것을. 소정은 주변에 아시아 여성들에게 독일에 살면서 인종차별, 성차별이나 편견 때문에 힘들었던 경험에 대해 말해달라고 했다. 나도 3가지 이야기를 녹음했다. 작가로서 이 주제를 자주 다루는 내게 이 곡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제 마음도 다르지 않아요. 우리 이야기는 더 알려져야 돼요.”


한국 전통 악기인 아쟁과 전자음이 어우러진 곡 <나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도 의미심장하다. 아쟁 연주자는 소정의 중학교 시절 레슨 선생님인데, 인연이 여태 이어져서 옛 제자의 졸업 연주회에 섰다. ‘그 모든 일들을 겪고도 나 아직 살아있다’고 생존을 공표하지만 남은 삶에 대한 불안과 혼란을 감추지 않는 이 곡에는, 서양에선 생소한 아쟁을 굳이 써야만 했을 것 같다. 처연하지만 연약하지 않고 떨림과 내지름이 공존하는 아쟁 소리처럼, 그렇게 살아남았고 살아갈 선생과 제자의 대화이다.   

      
음악극(Musiktheater) 형식의 곡 < _에 대하여 >는 타악기 연주자 진유영의 연주 영상으로 나왔는데, 샤머니즘 의식을 연상시킨다. 흰 천을 뒤집어쓴 여자가 낮게 중얼거리며 물건들을 쓰다듬고 두드리고 밟고...급기야 깨뜨린다. 희뿌연 조명을 받고 서 있던 항아리는 목장갑을 단단히 끼고 육중한 망치로 툭툭 내리치는 그 손길에 의해 퍼서석 깨진다.

항아리 속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아마도 온갖 원흉들.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부당한 폭력. 폭력을 허락하는 힘들. 죽임당할 것 같아서 먼저 죽여야 할 것 같은 힘들? 연주를 보고 듣는 내 입꼬리는 은밀하게 올라간다. 명치께에서 쾌감이 퍼진다. 작고 가느다란 아시아 여성 연주자가 이런 파괴적인 연주를 한다는 것 때문에. 그걸 상류층 백인 남성들 손에 대물림되어 온 클래식 음악 무대에서 한다는 것 때문에. 그로 인해 많은 것들이 지금 산산조각 나니까. 고정 관념이, 특권이, 과거가, 속박이, 두려움이...   

  

< _에 대하여 >의 한 장면. 유소정 작곡, 진유영 연주 작품


그러니까 소정의 음악은 전부 좀 어둡고 무겁다. 

고요하고 그로테스크한 작은 동굴에서 오래도록 빛과 온기를 내는 모닥불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게 멋진 선물이 되었다.

‘창작의 고통’이란 말, 흔히들 하지만 나는 창작하면서 ‘아무렴, 삶의 고통보다야 더 할까’라고 혼잣말 한다. 창작은 삶의 고통을 탐구하며 치유하는 과정이자 크고 작은 죽음과 소생의 공적 기록이다. 창작물은 어떤 찰나의 장면이다. 고통과 억압의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가, 영원히 죽지 않는 새처럼 잿더미에서 휙 날아오르는 순간. 선홍빛 깃털 몇 개가 공중에 흩날리는 순간. 그런 광경에 감동을 받을 때 창작자에게 선물을 받는 셈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나 말고도 많은 것 같다. 공연을 함께 만든 여성 창작자들. 동료의 작업을 보러온 아시아 음악가들. 얼떨결에 초대받아온 소정의 옆집 남자. 한국에서 여행 온 나의 친구들. 그리고 특히나 소정의 ‘졸업 시험’을 채점하러 온 백인 남자 교수들. 익숙한 환경에서 사회의 인정과 환대를 받으며 살아온 이들이 거기 편히 머무르면서도 8천 킬로미터 밖에서 온 젊은 여성의 초문화적(transcultural)인 고민과 통찰을 듣는다는 건 분명 선물. 이들의 감각과 인식은 덕분에 한층 넓어질 것이다. 허름한 차림으로 오가며 소정의 가방을 들어주고, 판정하거나 군림하지 않은 채 다만 격려하고 긍정해주었다니,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다.


오늘, 작은 실내악 공연장에서 우리는 음악 선물을 주고받는다.

어둡고 열렬하다.

또 하나의 살아있는 순간이다.


유소정 작곡가는 어느날 페이스북 메시지로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았고, 우리는 곧 작품을 무대에 함께 올리는 창작 동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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