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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Oct 28. 2022

보물섬으로 은퇴한 소방관 할머니

혼자 그리스로 이민 간 75살 친구를 만나러 가다

1959년 지중해의 로도스 섬. 13살짜리 빨간 머리 여자애가 복원 중인 오토만 시대 궁전 앞을 초조하게 오간다. 입구를 지키던 경비원이 한눈을 파는 사이, 뾰족한 철창을 용케 넘어 유적지에 숨어 든다. 휘황찬란한 벽화와 기하학 무늬, 보석 박힌 방들에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땅 속에 반쯤 묻힌 석회암 유적지를 놀이터 삼아 종일 밖에서 놀던 시절...


그로부터 62년 뒤, 머리에 흰구름을 인 할머니가 된 그 소녀를 나는 만났다.

아테네에서부터 18시간 페리를 타고 로도스 섬에 도착, 새벽 안개를 뚫고 우릴 마중 나온 도리스를 만났다. 나와 애인은 3주 일정으로 휴가를 겸해 도리스를 만나러 간 것이다.


도리스는 사실 내 애인의 ‘구여친’인데, 이따금 전해듣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워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도리스는 20대에 소방관이었는데, 당시 미국 캔자스 주 최초의 여성 소방관이었단다. 160센티미터에 48킬로그램 정도 될까 싶은 작은 체구인 사람이 30킬로그램 넘는 장비를 지고 다니는 일은 택한 이유는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나.


이후 대학원에서 박물관 행정학을 공부했다. 10대 초반 2년을 살았던 로도스 섬에서 싹튼 문화 유적에 대한 흥미를 따른 것이다. 대학 부설 박물관이나 공항 기록보관소에서 일했고, 두 번 결혼했지만 얼마 안가 끝냈다. 딸 둘을 낳아 길렀는데 지금은 왕래가 많지 않다고 했다.


도리스는 여러모로 범상치 않은 여성인데, 가장 압권은 5년 전 은퇴하면서 혼자 그리스로 이사 왔다는 사실이다. 남들은 평생 떠돌다가도 노년에는 고향으로 되돌아오는데 반대로 멀리 떠난 것이다. 로도스 섬에 몇몇 연고가 있다고는 하지만 교류는 드문드문 했고, 그리스어도 할 줄 모른다.


돈이 넉넉해서 미국과 그리스를 자주 오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연금 월 120만원이 수입의 전부란다. 사정을 알면 알수록, 어린 시절 추억을 쫒아 온 ‘모험적인 은퇴’ 같았다. 흠, 이렇게 독립적이고 ‘파이팅 넘치는’ 할머니라니. 내 취재 본능이 자극을 받을 수밖에. 또 한편으로는 ‘로도스 섬’이라는 단어가 주는 낭만에 젖기도 했다. 그녀와 나 사이에 뭐랄까, 세대와 문화를 초월한 여성 연대가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두근거렸다.


지역 아티스트들의 회화 몇 점, 바다 한 조각이 보이는 발코니, 직접 뜬 크로셰 소품들이 있는 도리스의 24평 아파트. 나는 습도 80%에 짜고 따뜻한 11월 공기에 적응하며 그녀의 일상에 함께 했다. 이 75세 노인은 매일 새벽 6시에 기상, 책상에 앉아 메일과 문자에 답을 한다. 미국 뉴스도 본다. 오전엔 주로 ‘바깥일’을 보러 간다. 장보기, 보청기 수리 맡기기, 친구와 차 마시기 같은 일들. 자가용이 없고 버스는 자주 안 오니까 먼 거리도 늘 걸어 다닌다. 오후에 빼놓지 않는 일과가 있는데, 바로 길고양이 돌보기와 미국에 있는 친구와 화상 통화를 하며 고주파 테라피를 하는 것. 밤에는 유튜브를 보며 크로셰를 한다.


몸이 안 좋은 날은 침대에 파묻혀 드라마를 본다.

            “<뉴 암스테르담> 너도 봤니? 시즌 2부터 아주 난리야. 이성애자가 없는 거 같더라.”


요리를 거의 하지 않고 주로 생식을 한다.

            “이젠 오븐에 굽는 요리 같은 건 아주 귀찮아. 예전엔 어떻게 했나 몰라.”


이렇게 혼자 사는 도리스가 불행해보이지는 않았다. 경력을 살려 자원 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어울려 춤 같은 걸 배워도 좋겠다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내 관점. 코로나 시대에 이만하면 안전하고 질서 있는 삶이었고, 같이 있다 보니 내 마음도 차분해졌다.


그런데 닷새가 지나 예상 밖에 일이 벌어졌다.

도리스가 더 이상 같이 지내기는 무리라는 ‘동거 불가 선언’을 한 것.


나와 애인은 자타공인 조용하고 깔끔한 사람들임에도...충분치 않았다. 장보고 나서 과일을 곧바로 씻어두느냐, 설거지를 바로 해결하느냐, 욕실 세면대에 물방울을 닦느냐 아니냐 같은 사소한 습관 차이도 거슬린다고 했다. 정확히 그녀의 방식대로 공간을 써야 하는데, 그게 갑자기 되나. 게다가 오랜만에 다른 사람들과 집을 공유해야 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했다. 나는 속으로 아주 조금 의심해보기도 했다. 나와 애인이 꽁냥거리는 걸 보는게 좀 거슬리는 건 아닌가. 그와 사랑했던 3년의 추억이 이상하게 덧칠될까봐 그러는 건 아닌가... 차마 그렇게 물을 순 없었다.


아무튼 3주로 계획한 우리의 시간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래도 닷새 동안 호스팅 해 준 것이 고맙고, 호기심과 호의로 인연을 맺은 것도 즐거웠기에 나는 유감도 후회도 없었는데, 다만 한 가지 질문이 계속 맴돌았다.


‘내가 바라는 노년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나이 들어가면서 지금보다 흔들림이 적은 자아와 확고한 내 공간을 갖기 원한다. 한편으로 사람들과 어울려 지지고 볶는 공동체 생활도 꿈꾼다. 두 가지가 공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막연히는 알고 있다. 자기 공간의 경계와 개성이 뚜렷하면 그 안에서 고집과 강박이 강할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통제를 벗어나면 도리스처럼 마음의 평화를 잃고 찾아온 사람도 밀어내게 된다.


자기 세계가 너무 단단하면 그만큼 관심사와 이해가 굳어져 테두리 밖에 것들과 더 이상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도리스가 나에 대해 묻지 않은 것처럼. 나는 이미 조금은 도리스 같은 ‘강하고 독립적인 여자’인 것 같은데...무엇을 지키고 무엇은 버려야 할까.


사실은 도리스도 여전히 자기 의심과 확신 사이를 오가고 있지 않을까?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그 때는 서로 한 가지씩 번갈아 묻고 답하자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까? 강하고 독립적인 그녀라면...


비수기의 로도스 섬 거리엔 사람보다 고양이가 훨씬 많다. 매일 오후 고양이 사료통을 지참하고 동네 길냥이들을 만나는 것이 도리스 할머니의 루틴. feat.직접 뜬 진분홍 스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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