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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Apr 18. 2023

기후위기, 감정으로 이야기할 때

4050여성들의 에세이집 발간을 기념하며!

워크숍 강사가 작품집을 읽는 독자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대신한 네 개의 메모:


버지니아 울프와 4050 그녀들

1928년에 쓰인 대학 강의록인 ‘자기만의 방’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글이 쓰려면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머나먼 영국 런던의 한 강연에서 울렸던 말들이 머나먼 시간을 건너 이곳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까닭은 저 간명한 선언에 분명한 진실이 담겨 있어서일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득이나, 아무 방해없이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자기 방이 없는 여성들이 사실은 지금도 수두룩하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울프보다 우리 쌤들(워크숍 참가자)이 더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울프처럼 ‘아내의 글쓰기를 지지하는데서 나아가 일정 관리까지 하던’ 남편을 둔 것도 아니고, 딩크족으로 살다 간 그녀와 달리 쌤들은 대부분 자녀 돌봄을 도맡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울프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아 완경기를 넘어가고 있다. 쇠락하고 있는 (좋게 말해서 변화하는) 몸에 당혹과 좌절을 느끼지만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 애쓴다. 무엇보다 이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읽고 쓰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마지막 시간에 같이 글쓰기 시공간 계획서를 채워넣을 때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다. 가족들이 아직 다 자고 있는 새벽 다섯시 반에 일어나 쓰겠다, 아파트 단지 내 주민공용시설이나 카페에서 글이 잘 써졌다, 아직 자녀를 부양하고 있고 생계 노동이 우선이어서 쓰고 싶은 글에 집중할 수 없다. 아, 듣기만 해도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고 써야만 하는 그 마음들…에 나는 사랑을 보탤 뿐이다. 응원이고 존경이고, 그런 건 사랑에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사랑이 다 이긴다. 


또 한가지, 우리 쌤들은 여전히 꿈을 많이들 꾸고 계신다는 점에서 주머니에 돌덩이를 잔뜩 넣고 강에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은 울프보다는 훨씬 더, 내게 희망을 준다. 파이어족 선언을 하고 조선 팔도를 탐방한 끝에 부지를 낙점, 이사를 가신단다. 유산으로 물려 받은 다 허물어진 집에 놀자판을 도모하실 거란다. 동네 산책을 하며 온갖 새들을 만나 그 노래를 듣고 인간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기도 하셨다.


그렇게 삶이 계속되고,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일들을 계속하는 동안 당신들이 ‘레퍼런스’가 되었다는 것을 아실까. 함께 나이들어 가는 다른 여성들, 그리고 그때까지 잘 살아남을 자신이 좀 없는, 나같이 아직 덜 나이든 여성들이 참고할 레퍼런스.  


글쓰기 워크숍 작품집 <기후위기, 감정으로 이야기할 때> 무료 다운로드하기 (링크)

2005년생 아들이 1988년생 계모를 만나 생긴 일

우리 아이는 2005년생 남자애인데, 국적은 독일이지만 뇌구조에는 이탈리아, 미국, 한국, 독일도 다 들어있다. 아이는 최근에 이런 얘기들을 했다. 북극에서 시베리안 허스키에게 썰매를 끌게 하는 건 동물 학대라고. 굉장히 화를 내고 슬퍼하며 한참 열변을 토했다.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루스 긴스버그를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을 보고 와서는, 그거 페미니즘 영화 아니냐고 내게 물었다. 유명 평론가의 평론을 찾아봐야 영화 감상에 마침표를 찍을 듯한 태도였다. 미래를 위한 금요일 시위에 가느라 결석을 몇 번 했으며, 사실 자신은 양성애자인 것 같다며, 봉사단체에서 알게 된 남자애와 데이트를 하겠다고도 했다.


아이의 말을 들으며 나는 대개 시크한 척 “hmm…interessant (흥미로운데)?”라고 반응했고, 무심한 척 떠보았다. 어쩌다 그런데 관심을 갖게되었냐고. 아이는 뭘 그런 싱거운 질문을 하냐는 표정으로 잠시 멍 때리더니 이렇게 답했다. “weil…Du (너 때문에)?” 그 무렵 나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타향살이' 때문에 점점 딱딱하고 투명하고 쪼그라들고 있었는데, 아이의 짧은 그 한마디에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아, 사소하지만 미약하지만은 않다. 자기 자신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한, 가장 중요한 것들을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한, 나는 매순간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내 삶은 사소하지만 미약하지는 않다.’ 


이번 워크숍을 함께 한 쌤들은 나의 깨달음에 다들 공감하실 것도 같다. 그런 퍼뜩한 순간들이 쌓여 우리는 어쨌거나 오늘도, (찔끔찔끔이라도) 읽고 쓰는 거겠지. 우리 안에 이야기가 고요한 옹기 속 천연 발효 간장처럼 찰랑찰랑 숙성되고 있겠지.  


아무튼 우리 아들은 내가 낳진 않았지만 참 기특하다. 그리고 잘 생겼다. 


시민 참여형 즉흥 연극

강사에게 강의가 무대라면, 글쓰기 워크숍 같은 강의는 시민 참여형 즉흥 연극인 것 같다. 연극의 대략적인 주제의식과 씬 구성은 미리 정해져 있지만 대본은 없고, 전문 배우가 아니고 이곳저곳에서 모인 시민들이 등장인물이 되어 픽션과 논픽션을 넘나들며 연기 아닌 연기를 수행한다.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속으로 이런 상상을 하고 있으면, 안 그래도 재밌는 워크숍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즉흥 연극이다보니, 우주에 딱 한번뿐인 장면들이 딱 한번 연출되고 곧 지나간다. 예측불허한 전개. 짜릿한 스릴과 즐거운 충격.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준비도 필요없는 연극 작업. 다만 몰입해야 한다. 순간을 불태워서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다정한 존중과 짓궂은 도발 사이에서 비틀비틀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한번 써보세요! 재밌을 것 같은데.” “아이고…힘드셨겠어요. 지금 글이 안 써지면 그냥 두셔도 됩니다.”  


이번 워크숍을 이끌어가는 8주 동안 자잘한 마찰과 실망과 기빨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상기했다. 아, 이것은 즉흥연극이다. 단 한번뿐이다. 지금이 아니면 없다. 그러다가 무사히 도달했다. 얼기설기 중구난방 오락가락한 구상과 초고 단계에서 두세번의 퇴고를 거쳐 완성된 (일단 완성이라고 하자) 쌤들의 글을 보니 고마움과 뿌듯함, 위기감과 경외감이 속에서 뒤엉킨다. 경험이 생각으로, 말과 글로 변환되는 과정은 언제봐도 심장 떨어지게 의미심장하다.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말과 글을 들어주고 읽어준다는 것, 그런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오로지 그것을 위해 모인다는 것이 나는 여전히 놀랍다. 그 덕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글들이 또 한번 모였다. 모였기에 들어줬기에 궁금해했기에 읽었기에 써지고 만 글들이다.


워크숍 목표 및 주안점 (운영계획안에서 발췌)

다양한 사회 공동체에서 리더이자 주요 돌봄자로 살아가는 4050 여성들이 기후위기 시대 자신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사유하고 기록하는 장을 마련한다. 기후 우울감을 겪는 여성들이 모여 서로 지지하고 공감하는 커뮤니티를 조성한다. 기후 감수성이 높은 4050 여성들의 목소리를 잘 아울러 우리 사회와 공유한다. 참가자 1인당 2편의 글을 최종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워크숍 종료 후 투고를 받아 작품집을 제작 및 배포합니다. 


글쓴이: 하리타 haritamoonrider.com 

서울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있지도 않은 ‘시골 할머니 집'을 그리워할만큼 자연이 좋았다. 환경 활동가로 일하던 20대 중반에 좀 더 래디컬한 변화를 위해 독일로 떠났다. 생태 도시 프라이부르크에서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발랄한 전환기를 보내면서 창작자로 폭풍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기후위기, 페미니즘, 이주난민 분야에서 직접 체험하고 통찰한 것을 부지런히 쓰고 발표했다. 현재 모두를위한환경교육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양한 시민 그룹들, 특히 여성·이주민·장애인·활동가들과 만나 서로의 삶을 경청하고 응원하는 글쓰기 워크숍을 계속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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