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생이었을 무렵.
어느 날, 엄마에게 말을 걸었더니
"정림아, 엄마한테 말 시키지 마. 엄마 지금 손님들하고 말하기도 힘들어..."
"..."
그날은 어린 마음에 많이 속상했다. 그때는 엄마가 하루도 쉬지 않고 장사를 하시느라 몸이 많이 지치고 힘들어서 나와 말을 할 기운이 없다는 걸 어려서인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럼 누구랑 얘기를 하지?'
갑자기 오빠가 떠올랐다.
나보다 나이가 4살 많은 오빠는 늘 친구들과 노느라 바빠서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마지막 대화 상대로 아빠가 떠올랐다. 아빠는 늘 한결같이 자상했으며 사랑한다고 자주 얘기해주셨다. 새벽에 도매시장에 장을 보러 가시기 전에도 늘 내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밤새 걷어찬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고 내 볼에 뽀뽀를 해주시고 나서야 시장에 가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88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도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아이들이 넘쳐났다. 한 반에 아이들이 50명 이상이었고 1학년도 열 반이 넘었다. 그래도 반이 부족했었는지 1학년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서 수업을 했다. 그 당시에는 아이들이 많은데 비해 학교시설이 많이 부족했었는지 걸어서 20-30분 정도 걸리는 초등학교에 배정을 받아서 아침마다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1학년이었을 때 학교 화장실이 교실 옆이 아닌 옆 건물에 있어서 혼자서 먼 화장실까지 가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못 가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됐고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아무리 참으려고 애를 써봐도 결국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꾹꾹 참고 있었던 오줌이 새어 나와 버려서 내가 앉아 있던 의자와 바닥이 흥건해졌다. 너무 놀랐고 창피해서 어디론가 숨을 수만 있다면 숨고 싶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남자 짝꿍이 선생님께
"선생님, 정림이가 쉬 했어요."라고 얘기를 했다.
"..."
그 순간 우리 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다.
하교를 하는 길.
바지가 젖어서 기분이 찝찝했던 나는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교문을 빠져나왔다.
자전거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온 아빠를 교문 앞에서 만났다.
"아빠. 미안해... 내가 수업시간에 바지에 쉬를 해 버렸어..."
8살이나 된 다 큰 딸이 학교 교실에서 오줌을 싸 버려서 아빠에게 많이 혼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의외의 대답을 하셨다.
"괜찮아. OO는 바지에 똥도 쌌어."
"진짜?"
바지는 축축하게 젖어서 찝찝하고 창피했지만 나는 똥이 아닌 오줌을 쌌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날도 역시 아빠는 학교가 끝나고 학교 앞 문방구에 날 데려가서 내가 좋아하는 얼려서 파는 살구 맛 음료수를 사주셨다. 다행히 그날 이후로는 쉬는 시간에 미리미리 화장실에 다녀와서 다시는 바지에 오줌을 싸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중학생 때에도 설날에 아빠와 단둘이서 용인에 있는 에버랜드에 놀러 갔다. 설날이고 겨울이어서인지 놀이공원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아빠와 나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같이 생긴 놀이기구를 탔다. 우리 둘만 탔는데도 신기하게도 놀이기구가 돌아갔다. 날씨가 춥고 바람이 불어서 차가워진 놀이기구 손잡이를 잡느라 손이 많이 시렸지만 마치 아빠가 나를 위해 에버랜드를 통째로 빌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신나서 이것저것 다 타보았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아빠와 단둘이서 월미도에 갔다.
디스코팡팡 놀이기구도 같이 타고 아빠가 다트로 풍선을 잘 맞추어서 작은 인형도 얻고 스티커 사진도 같이 찍었다. 고등학생 때 아빠와 스티커 사진을 찍는 친구들도 많이 없었고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월미도를 아빠와 같이 갔기에 아빠가 마치 내 친구 같은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대학생 시절.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와 남자 후배와 같이 셋이서 여의도에 있는 63 빌딩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은 친구와 여의도에 간다고 말하고 잠이 들었다. 아빠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계란을 삶고 딸기를 씻어서 친구와 같이 한강에서 먹으라고 도시락을 싸 주셨다. 계란만 먹으면 목이 멜까 봐 걱정이 되셨는지 사이다도 시원하게 미리 냉장고에 넣어두셨다. 63 빌딩을 구경하고 한강에 있는 잔디밭에 앉아서 친구와 후배와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그때 후배가 "선배 아버지 메리야스에는 딸바보라는 택이 붙어 있을지 몰라. 나도 나중에 결혼하면 딸한테 선배 아버지처럼 잘해줘야지."라고 얘기했다.
그날은 아빠 덕에 친구와 후배와 좋은 추억 한 가지를 만들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처럼 아빠와의 추억은 열 손가락에 꼽을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나중에 크면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내 곁에 안 계셔서 친근하고 부르기 쉬운 아빠가 아닌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고 부르기 어려운 아버지라는 호칭으로 바뀌었지만 가끔씩 TV에서 아버지에 관한 얘기가 흘러나올 때면 아빠가 참 그립고 보고 싶다.
길을 가다가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주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정하게 밀고 가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쳐다보게 된다. '우리 엄마, 아빠도 아무 일도 없으셨다면 진작에 힘든 장사를 접으시고 노년에 손주들 재롱을 보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셨을 텐데...'라는 아쉬운 생각이 들어 한동안 멍하니 그 유모차가 멀어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와 얼굴이 붕어빵처럼 똑 닮았던 우리 아빠.
예전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우리 가족 모두가 함께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보니 가족과 부모님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들이 서로 보이지 않게 노력하고 사랑과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어야지만 비로소 가정이 유지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아 버렸다.
어렸을 때는 한없이 사랑했고 커서는 엄마를 고생시킨 것을 알기에 점점 미웠던 아빠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가 가끔 있다. 참 많이도 사랑했었고 많이도 미워하고 원망했었다. 어느새 연기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아빠. 지금은 어디에 살고 계실까?
앞으로 언젠가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남편과 아이들을 소개하고 함께 따뜻한 밥을 단 한 번이라도 먹으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