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 원은 '한국의 고건축 3권 종묘 편'에서 '이런 건축적 표현과 공간의 구성은 대단히 세련된 솜씨로 그 세련미는 겉으로 뛰어나게 돋보이기보다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어서 그 공간적인 감동을 더욱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건축으로써 이런 정밀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어떤 조형의지의 발로이기보다는 영원에의 염원이 격조 높은 솜씨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빚어진 일품이다. 조형의지라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를 갖지만 어떤 염원이 만든 작품은 그 한계를 초극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라고 썼다.
건축가 승효상은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에서 ' 제관이 제를 올리기 위한 가운데 길의 표정은 우리를 피안의 세계로 이끄는 듯하며, 불규칙 하지만 정돈된 바닥의 박석들은 마치 땅에 새긴 신의 지문처럼 보인다'라고 하였다.
유홍준 교수는 '평범한 작품은 그 작품의 유래를 따지게 하지만 명작은 거기서 받은 감동의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예술 본질의 물음에로 이끈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배병우 작가의 사진 '종묘의 겨울'을 보았다,
많지 않은 눈이 살포시 덮인. 적막한 겨울의 종묘는 단순함이 감싸고 있었다. 경건한 영혼의 집이었다. 죽음의 모습은 이토록이나 단순하고. 숭고한 것일까.
조 풍류의 종묘에는 달빛과 푸름이 있다.
왕과 왕비의 영혼의 집인 종묘를 그렸다.
부산함이 사라지고 정적이 찾아오면, 정전의 회랑 사이를 왕과 왕비들이 거닐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 같다. 푸른 달빛에 비친 흰 옷은, 푸른빛이 서릴까, 노란빛에 물들까?
살아오면서 만난 다양한 죽음들은 엄숙하거나 숭고하지 않았다. 내가 봐왔던 죽음들은 누추했다. 살던 냄새를 미처 씻어 낼 새도 없이, 엉겁결에 맞이한 죽음이었다. 신전으로 남지 못한 그들은 다 어느 곳에 머무를까? 단순할 수 조차 없이 애절한 영혼은 어디에 집을 지을까?
지금도 고향집, 앞산 뒷산에는 무덤들이 즐비하다. 윗집 고등학생 오빠는 학생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교련복 깃을 올리고, 묏 잔등에 비스듬히 누워 기타를 튕겼다. 겨울이면 우리들은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 비료포대에 짚을 잔뜩 넣어 만든 눈썰매를 신나게 타고 내려왔다.
외국인들은 시골 동네 한가운데 떡 하니 자리 잡은 무덤을 보고 놀란 다는데, 우리들에게는 놀다가 잠들던 곳이었다.
한문만 잔뜩 쓰인 비석을 밟고 올라가며 놀던 어린 시절에는, 영혼의 집이 놀이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