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의 히바, 그 새벽 밤

by 움직이기

타슈켄트 행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예매사이트를 들락날락했지만, 무섭게 매진이었다. 오프라인으로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히바역으로 갔다. 히바역 왼편에 표를 판매하는 사무실에서 나는 다행히도 타슈켄트 행 기차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곧 이 평온하고 고요한 도시를 떠나야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쉽고 애틋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렇게 발만 살짝 담군 채 둥둥 표류하는 시간을 청산한다는 것, 거친 흙냄새가 나고 피와 살이 뜨거워지는 나의 땅, 깊숙하고 찐득한 연결의 기반으로 돌아간다는 것에 기대감이 스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괴로움으로 다가왔었는데 말이다. 내 안에 이 기대감이 매우 고무적으로 생각되었다.



일상을 벗어나서 표류하면 가볍고 자유로울 거라 생각했다. 정말 예상대로 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나비 같은 자유로움과 가벼움을 만끽했다. 물론 현실에 두고 온 고민이 내 머릿속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지만 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하나의 확신이 들어섰다. 나는 내가 오래도록 혹은 영원히 그저 물 위를 표류하는 깃털 같은 삶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표류 한복판에서 깊숙한 지지대와 연결을 갈망하는 나를 알아챘다. 그리고 그것은 뿌리를 박고 굵직하게 몸통을 세워가는 삶에 대한 긍정성으로 서서히 발전해 가고 있었다.



이제 잠시나마 함께 다니며 정들었던 에미르와도 곧 작별이었다. 에미르는 카자흐스탄의 쉼켄트에서 이스탄불로 돌아가는 일정으로 장장 10개월여의 여행을 마친다고 했다. 갑자기 진지해진 에미르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한국에 꼭 가야 해? 나랑 같이 이스탄불에 가자! 안될 게 뭐가 있어? 지금 자유롭잖아."

“응............................?”

뭐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래도 너무 즉흥적이지 않나. 하지만 동시에 나도 모르게 겉잡을 수 없는 충동에 사정없이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이스탄불이라니! 심장이 미친 듯이 방망이질 해대었다. 사실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 정말 이 애는 왜 고요한 연못에 돌멩이를 사정없이 던져대는지 말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이미 머릿속에서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는 중이었다.


만약 간다면 혹은 가지 않는다면, 이 선택과 이 선택으로 열릴 잠재적 가능성들에 대해 후회 안할 자신이 있나. 이 모양 저 모양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계산기를 두드려댔다. 하지만 사실 어떤 것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다. 오직 나의 결정과 행동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말 가? 즉흥적 충동과 무모함 한가운데 나 자신을 훅 던져 넣어보는 그런 경험 말이다. 이성이라는 제어장치 때문에 평소 꽁꽁 붙들어 매놓은 고삐를 한번쯤은 풀어놓고 맡겨보는 것,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해보는 때가 또 얼마나 많이 있겠나. 그런 경험 속에서 인생의 또 다른 어떤 가능성을 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스탄불을 인생의 다음 시점으로 미뤄두기로 결정했다. 이스탄불은 참을 수 없이 격렬한 충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또 다른 여행의 자유로움, 낭만과 가벼움보다는 삶의 터전과 묵직함이 필요했다. 해야 할 소중한 것들에 대한 계획을 차츰 세워가야 할 시기라고 느껴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에 꼭 와. 네가 온다고 하면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있든지 간에 이스탄불로 바로 달려갈 테니까. 언제든지 오고 싶을 때 말해줘."



자정이 넘은 시각, 히바는 침묵에 뒤덮였다. 그림같이 둥그렇고 새하얀 달이 머리 위에 가만히 떠있었다. 파편처럼 분쇄된 별들은 흐드러져 있었다. 신비스럽고 어스름한 보라 빛 몽환의 시간, 세상 모든 것을 삼켜 버린 어둠, 휘- 부는 스산하고 시원한 바람, 담배를 피우며 서성이는 에미르. 모든 것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오! 별똥별이 떨어졌다. 밤하늘 위 하나의 별이 포물선의 궤적을 짧게 그리고는 마법같이 사라졌다. 황홀경이 나를 감쌌다. 이 세상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우주의 어느 시공간 한 켠에 갑자기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이 내 어떤 과거와도 단절된 느낌이었다.



저 길로 손을 흔들며 가던 에미르는 이제 어둠에 완전히 파묻혀 형체도 보이지 않았다. 어리지만 용감한 에미르는 내가 참 좋아한 친구였다. 씁쓸한 느낌이 몸통으로 슬며시 올라오고 있었다. 헤어짐, 분리라는 인생의 평범한 주제에 유독 예민하고 민감하게 느끼는 내 기질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인간은 만나면 결국 헤어져야 하는 걸까. 왜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여야 할까. 결국 어차피 헤어져야 할 것이라면 대체 시한부밖에 안 될 만남은 왜 필요하지. 무슨 의미가 있나. 이런 질문들을 속으로 던지던 중이었다.

갑자기 저 먼 길 끝에서 불빛이 탁 켜졌다. 불빛은 몇 번씩 좌우로 왔다 갔다 했다.

"안녕! 잘 있어. 그리고 또 만나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핸드폰으로 불빛을 켜서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이스탄불에서 어디 한번 만나도록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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