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시간 대륙의 기차여행

by 움직이기

히바 역, 타슈켄트까지 장장 16시간의 기나긴 기차여행을 코 앞에 두고 있었다. 내 자리는 총 네 개의 침대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좌석의 아래 칸 이었다. 빼빼마른 남자, 건장한 큰 체격의 남자, 그리고 그 옆에 풍채 좋은 아저씨까지 세 명의 남자가 앉았다. 그들은 나를 두고 이따금씩 짧은 대화를 주고받다가 이내 침묵했다. 우리 네 사람의 둘 곳 없는 눈동자가 서로 허공에서 만났다가 흩어졌다가 하길 반복하였다.



한 두어 시간 정도나 달렸을까. 기차가 멈췄고, 사람들은 밖으로 나갔다. 나는 기차가 언제 다시 출발할지도 모르고, 나가기도 귀찮기도 해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히바로 오는 기차에 같이 탔었는데, 혹시 기억 안나요? 같이 탔었거든요."

중년의 우즈벡 남자분이 내게 오더니 유창한 한국말로 내게 물었다. (역시 우즈벡에는 한국말 고수들이 많다)

평택에서 일하신다는 이 분은 한 달간 휴가를 맞아 본국으로 잠깐 들어오셨단다. 친지를 방문하시려고 히바 행 기차를 탔었는데, 그때 바로 뒷자리에 내가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또 만나게 된 것이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그 분과 나는 또다시 같은 기차 칸에,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있었다.



그 분은 나를 아내에게 소개시켜주셨다. 그녀는 그윽한 청록 빛 벨벳원단의 드레스를 입고 인형 같은 손녀를 품에 안은 채 앉아계셨다. 그녀는 러시아어 선생님이란다. 그녀에게는 지적인 총명함과 겸손함 같은 것이 자연스레 배어 있었는데 나는 그런 그녀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중저음 톤으로 유창하게 구사하는 러시아어는 무척 중성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아내분의 옆에 앉은 여인은 히바에 있는 어느 초등학교의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한살 어린 85년생이었는데, 벌써 딸도 있고, 아들도 두 명이나 있었다. 그녀의 핸드폰은 온통 가족과 친척 사진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세대이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고.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문득 나는 내가 한국이 아닌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마 지금과는 다른 선택들을 해오고 살지 않았을까. 지금 내 모습과는 차이가 있으리라. 태생과 환경, 사회라는 물리적 조건이 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약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우리는 우르겐치에요. 여기에서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출발할거에요. 같이 식사하죠!"

두 분이 주섬주섬 가방 속을 풀어헤치자 마법처럼 여기저기서 각종 음식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차와 과일, 과자와 쵸콜렛, 빵과 치즈가 금세 뚝딱 한 상 풍성하게 차려지는 진풍경! 기차에서 간식은 봤다만 이런 한상차림은 본 적이 없었다. 대륙의 열차 안 진수성찬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들어요!” 아내 분께서 빵을 한 덩이 크게 찢어 나에게 주셨다. 직접 만드셨다는 치즈는 맛이 정말로 풍부했다. 건네주신 과자와 쵸콜렛까지 살뜰하게 정말 잘도 먹었다. 몸과 마음이 든든하고 뜨듯해진 느낌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곧 창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기차안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눈을 감았다. 손바닥을 위로하고 두 손을 동그랗게 모은 채로 속삭이듯 신에게 기도를 하는 거였다.

"지금 우리는 강을 건너고 있어요. 신성한 이 강을 지날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를 해요. 소원이 이루어질 거예요. 같이 합시다."

나도 두 손을 고이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쉭쉭 속삭이는 사람들의 기도소리와 기차소리가 뒤섞여 내 귓가에 부드럽게 아른대었다.


아침부터 분주한 열차, 부산스러운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사람들은 좁은 기차 안에서 공간을 내어주거니 비켜주거니 하면서 바쁘게 이리저리 이동하고 있었다. 앉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낮은 천정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몸을 앞으로 깊게 접어 좌전굴을 한 채로 엉덩이를 꿈적거리며 침대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소란스러운 기상시간이 마무리 되자,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차와 빵으로 아침식사를 했다. 아내 분께서 빵을 한 덩이 주셨고, 곧 아저씨께서 달달한 믹스커피 한 잔을 타주셨다. 별 기대 없이 받아든 믹스커피는 예상외로 맛이 정말 좋고 부드러워서 아침부터 속으로 연신 감탄을 했다. 아...우즈벡은 과자만 맛있는 줄 알았더니만, 믹스커피까지 맛있다!



아침 8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드디어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처음 타슈켄트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도 낯설었건만 사마르칸트, 부하라, 히바를 돌고 돌아서 다시 온 타슈켄트는 이제 내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리면서 장장 16시간동안 이렇게나 저렇게나 나를 먹여주신 분들께 감사인사를 드렸다.

"여행 건강하게 조심히 하고 가세요!"



기차역은 마중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게다가 아침 출근 시간이라 역 바로 앞 도로에는 수많은 차량들이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어내고 있었다. 혼잡한 길 위에는 다들 어디론가 바쁘게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 일대 주변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빵빵 폭력적으로 울려대는 경적소리와 여기저기 소리치는 사람들 소리에 정신이 털리는 느낌이었다. 아, 달콤 고단한 여행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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