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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교육주체 간 연대가 필요하다,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

by 오영

하인리히의 법칙(1:29:300의 법칙)과 학교의 이상 징후


최근 대전에서 한 교사에 의해 초등생이 살해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충격과 슬픔 속에 국회와 교육당국은 백가쟁명식 법률안과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김성천교수는 [교육언론 창]에 [하인리히의 법칙으로 본 부적격 교원정책]이라는 언론기고를 통해 사후약방문식 대책을 비판했다.

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98

하인리히의 법칙은 1930년 초 미국 보험회사 관리가 발견한 법칙으로, 노동 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 중상자 한 명이 나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 또 운 좋게 재난은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상해자가 300명이 있었다는 법칙이다.(그래서 1:29:300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어떤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같은 원인으로 수십 차례의 경미한 사고와 수백 번의 징후가 반드시 나타남을 뜻하는 통계 법칙이다. 우리 주변의 작고 경미한 징후들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한 결과는 어느 날 큰 재해로 이어진다. 이번 사건도 이미 작고 경미한 징후들이 있었다. 이번 사건은 이를 무시한 결과다. 김성천교수는 온정주의와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사전에 사건을 막을 수 있는 내부 자정 시스템(전문성과 윤리성을 기반으로 한 동료 평가, 학교장 중심의 근평 체제에서 벗어난 교원·학생 중심의 다면 평가, 학부모는 학교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하거나 건의 사항을 제시로 전환, 학교장이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인사 권한 부여, 특정 사례에 대한 심층적, 전문적, 객관적 판단이 가능한 위원회 구성 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부적격 교원’이 극히 일부나마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문화와 풍토, 제도의 힘을 통해 스스로를 자정하고 통제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이 어려운 경우에는 공동체의 힘으로, 그것도 어려운 경우에는 제도와 시스템으로 견인해야 한다."


김성천 교수의 의견처럼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다양한 기재들을 학교 내부에 만들 수 있는 분위기와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충격적인 사건을 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왜 학교에는 이상한 선생이 많은가]라는 책을 북카페에서 발견하였다. 책의 내용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다. 굳이 연관성을 따진다면 하인리히 법칙에서 300에 해당하는 작은 징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이 내 시선을 끈 것은 도발적인 책 제목 때문이었다.

학교에 이상한 선생이 많다니.

현직 교사가 이렇게 대놓고 얘기해도 되나?

학창 시절 겪었던 '이상한 선생'에 대한 험담은 사석에선 단골 메뉴지만, '이상한 선생'에 대해 공개적으로 책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0년 차 교사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은 2015년 출판되었다. 출판 당시 이 책에 대해 여러 논쟁이 있었을 것이나 정작 교육당국이나 관리자들은 귀담아듣지 않았을 것 같다.


10년 전 이야기이므로 시대 상황이나 글쓴이의 생각이 그때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지금 언급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학교 현장의 모습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느낌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창 시절 이상한 선생에 대한 기억을 한 두 가지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막상 공식적이거나 공개적인 자리에서 이상한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진 못했었다. 왜냐하면 교권을 신성시하는 사회적 분위기(실제 현실은 다르지만)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직교사가 교직 사회를 공개적으로 디스 한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학교교육의 문제를 교사 탓으로 돌리거나 교사를 혐오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이 점을 조심스러워했다. 일부 교사의 문제이고 교육관료주의, 교육정책, 교육시스템이 보다 근본적인 문제라고 말한다.(이건 학부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일부 학부모의 문제로 전체 학부모를 혐오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사회가 부조리하고, 학교는 우습도록 불합리하고, 그 속에 있는 우리는 덫에 걸린 쥐처럼 운신의 폭이 좁지만, 그럼에도 주체적인 ‘나’로서 존재하는 것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교사가, 교사의 이름으로, 교사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저자는 교육 주체로서의 교사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나 또한 그 점에 깊이 동감한다. 오늘날 학교 교육의 문제가 사회구조적 모순과 교육시스템의 한계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육 주체로서 책임을 면제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학교교육이 직면한 문제들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결국 학생들이며, 교육주체들은 이러한 사실을 외면해선 안된다.


"이상한 사람들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며 교직 사회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불가피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 피해를 다수의 어린 학생이 고스란히 짊어지기 때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교사는 신이 아니다, 교실에 필요한 건 인간들 사이의 신뢰다


저자는 "교실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교사가 가질 수 있는 권력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증식"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이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모든 교육 활동이 '학생의 필요, 이익, 안전을 우선시한다'는 가정 아래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의 깊은 의미는 학생을 향한 ‘의무와 책임’이지 권리가 아니다"


교사의 역량 기준과 기대치에 대해 우리 사회는 매우 높은 기준을 요구한다. 때로는 교사 스스로도 사회의 높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헌신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사는 우리 사회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다르다. 기대와 현실이 다른 가운데 갈등이 생긴다.


그렇다면 사회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는 교사가 문제인가? 저자는 교사와 사회 모두 교직에 대한 허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발 딛고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사가 되고자 한 대부분의 젊은 층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자 했기 때문보다는 "경제적 불안 속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높은 연금이 보장되는" 직업을 선호했기에 인기가 높았었던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자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고 교직이 쉬운 직업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위 문제 학생들, 무기력한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적으로 이끌어 가야 할 것인가는 정말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이 또한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해야 할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교사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윤리적이고, 완벽한 성격이며, 교육행정을 빈틈없이 해내면서, 지식을 완벽하게 전달하고, 모든 학생을 완벽하게 이끌어낸다는 건 허상이다. 어느 누구도 교사에게 이러한 모습에 도달하도록 법이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강요할 수 없다. 강요한다고 될 리도 없다. 왜냐하면 교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43만여 명에 달하는 전국의 교사들은 각자의 교육철학과 개성을 가지고 각자의 삶의 모습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중에는 학부모나 학생이 기대하는 수준에 미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반대로 완벽한 교사의 허상을 만들고, 그 허상에 교권이라는 권위를 부여하면서 다른 교육주체들을 교실에서 배제하고 군림하려고 해서도 안된다. 현실에 발 딛고 선 교사, 학부모, 학생 등 각 교육주체들의 모습을 있는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학부모는 교육의 협력자- 연대를 위한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


저자는 학부모가 학교를 긍정적으로 이끈 사례를 소개하면서 학부모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상한 학부모'들로 인해 상식적인 학부모들이 뒤로 물러나 있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학부모는 아이를 맡긴 죄인이 아니다. 학교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인프라는 학부모가 낸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학부모는 자녀의 교육에 참여할 의무와 권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 학부모들에게 학교의 일에 왜 이리 극성을 떠느냐고 말한다면, “난 학부모로서 내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어떤 밥을 먹고, 어떤 환경에서 지내는지 알고 보살피고 싶다. 학부모와 교사가 협력해서 아이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나 학부모 모두 교육의 목적을 '학생의 안전과 성장'에 둔다면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학교의 모든 일이 ‘학생 쪽으로’ 굽으면 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 해결의 목표를 ‘학생의 안전과 성장’에 놓는다면,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교사와 학부모는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다수의 '선량한' 학부모들과 연대해야 소수의 '이상한' 학부모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교권 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학교 현장의 교사가 몸소 느낀 바를 통해 이런 의견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간 학부모의 공적 참여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내 입장에서는 우군을 만난 듯 반가웠다.


"이상한 학부모들에게 당한 경험이 있는 교사들은 학부모와 연대하는 데 심정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교사와 학부모의 연대가 탄탄하게 이루어지면, 소수가 이상한 방식으로 깽판을 치는 현상을 다수의 이성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학부모와의 연대는 교사들에게 결국 보호 장치로 작용할 것이다."


저자는 교사와 학부모의 연대를 위해서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소'를 회복하지 않는 한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교사와 학부모가 연대하지 못하도록 물리적으로 분리시키는 시스템(교사의 전보발령, 담임교사 외에 다른 교사를 알기 어려운 현실 등)을 극복하고 연대하여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장소를 확보하는 교원노조의 역할을 주문한다.


"이런 연대를 위한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시인 이문재는 민주주의는 장소의 문제라고 말했다. 장소를 회복하지 않는 한 참여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교사들이 학교를 옮기면서 발생하는 파편화, 본인 아이의 담임교사 외에는 알 수 없는 파편화, 주도권을 가진 세력이 이간질하면서 발생하는 파편화 등의 문제에 대응해 물리적 공간을 어떻게 확보할지 교원노조가 고민해주었으면 한다. 특히 가까운 지구나 지회의 교사들과 학부모가 스스럼없이 연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교원노조가 앞장섰으면 좋겠다. 이 공간에 관료적, 교조적, 고압적인 문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평적이고, 느슨한 연대를 맺으며,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절차적 정당성과 기계적 합리성의 한계 - 학교운영위원회


학교는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학교는 항상 평온한 모습의 외양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재된 갈등이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각종의 기계적 합리성으로 누르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결국 눌렸던 것이 터져 나와 갈등이 폭발하고 사태가 확산되고 나서야 부랴부랴 소통을 하고 대책을 세운다. 교육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학교에서 일어난 갈등의 결말은 항상 파국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기에 갈등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더 소극적으로 행정처리를 하고, 더욱 강하게 누를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다.


사실 교육주체들 간 소통을 통해 학교 운영에 대한 합리적 의사 결정이 되도록 제도화한 것이 학교운영위원회다.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적 자치기구로서 학교운영위원회는 형식적 운영이라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저자도 이를 지적한다.


저자는 다수결에 의한 불가역적 결정이라는 '절차적 정당성'에 의해 법령과 지침을 어기지 않았다는 '기계적 합리성'에 기대어 학교운영위원회가 필요 이상의 권위를 부여받는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민주적 자치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가 "민주주의 단점(다수결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과 관료주의(비밀주의, 보호주의)의 단점이 뒤섞인 최악의 복합체"로 일원화된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구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학교가 민주화될수록 학생, 학부모, 교사들은 수많은 문서와 복잡한 절차에 파묻혀가고 있다. 문서와 절차의 압도적 위압감보다 우리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은, 이를 통해 생산된 ‘절차적 정당성’과 ‘기계적 합리성’이 자유, 정의, 책임, 진보, 효율 등의 가치와 간단히 교환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나서서 문제제기를 하고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이로 인해 다소 학교가 소란스러워지더라도 "학교 관료주의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란스러움과 마찰’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학교의 ‘조용함’보다 훨씬 더 유익하고 가치 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진정한 보루는, 교육이다. -프랭클린 델레노 루스벨트"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의 공간을 기대한다


저자는 교사들의 역할이 학생들을 "세계 변화의 주체"로 나아가도록 만드는 지적 헌신이라고 말한다. 학부모 또한 스스로 공적 권리와 책임에 대해 분명하게 인식하고 학교교육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날 학교 교육의 모순과 문제들의 모든 원인을 교육 주체의 책임으로 환원하는 것을 경계한다. 반대로 교육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교육 주체들이 수동적으로 교육당국의 정책에 따라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다소 소란스럽게 느껴지더라도 교사, 학부모, 학생 등 교육주체들은 학교 현장에서 학교 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 속에서 신뢰를 쌓을 수 있어야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 말해도 비난으로 받지 않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육당국은 이를 위해 학교교육의 주체들이 만날 수 있도록 물리적, 시간적 공간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우리 학교, 우리 지역은 그런 공간이 없다고 푸념만 해서는 안 된다. 당장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더라도 교사와 학부모, 학생은 서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고 연대해야 한다. 그 속에서 새로운 연대의 공간은 만들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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