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춘기 시절에 아빠는 내가 어디 가기 싫다고 " 안가! "라고 말만 하면 “ 안가는 내 친구 이름이 안가야. ”라고 매번 그러셨다. 지금은 점차 내가 안가라는 말을 하지는 않다 보니 그 안가와 관련된 아빠의 대답을 안 들은 지 꽤 됐지만 말이다.
아빠의 옛 친구 중에 안가라고 불린 분이 한 분 계셨다. 아버지는 이 씨 이시고 그 친구분은 성이 안씨 셔서 서로 친근하게 이가, 안가라고 부르셨다고 한다.
안가라는 친구분과는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나서 알게 되셨다고 한다. 당시 안가 분의 어머니께서 우리 아빠를 무척이나 좋게 생각하셔서 집에 자주 초대해 주셨다고 한다. 당시 어렸던 우리 아빠의 예의 바른 모습을 좋게 생각해 주신 거 같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카리스마도 있으시고 아빠를 포함해서 5남매를 평소 엄하게 키우셨던 부분들도 있었기에 그 영향 덕분에 아빠가 워낙 지금도 그렇고 되게 예의를 우선시하시는 분이셔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어른분들한테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자라셨다고 한다.
안가라는 친구분은 아빠가 살던 동네랑 굉장히 가까운 곳에 사셨다고 한다. 학교 근처 개울가나 산자락에서 뛰놀며 늘 같이 부디 껴 지내셨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도 안가라는 친구분을 아직도 기억하실 정도니 말이다. 그때 시골 동네들은 건너 건너 옆집에 누구 집 아들, 누구 집 딸 전부 다 알 정도로 옹기종기 모여서 집들마다 거리낌 없이 지냈던 시기였다 보니 대부분은 아는 사이였다. 그 당시 고향친구 분들 중 우리 아빠와 가장 친했던 친구가 안가 분이셨다.
90년대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 아빠는 엄마를 만나게 되고 힘든 서울 살이를 하던 와중에 안가 분도 뒤따라 서울로 올라오셨다고 한다. 가끔씩 안가 분을 만난다는 아빠의 말에 엄마는 대체 어떤 친구인가 싶어 소개 좀 시켜 달라하셨는데 아빠가 엄마에게 안가 분을 소개해준 이후 다 같이 돈독한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엄마는 안가 분을 보면서 아빠가 참 올곧은 사람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안가 분은 성격이 정말 좋으셨다고 한다. 중간에 아빠가 군대를 가게 되셨는데 훈련소 들어가는 날에 안가 분도 같이 오셨다고 한다. 그때 안가 분은 군대 가는 아빠를 보고 엄청 우셨다고 한다. 시간 지나 아빠가 제대를 하시고 IMF 직전까지 회사를 다니셨을 때도 안가 분과 자주 만나며 술 한 잔을 기울이셨다고 한다.
안가 분은 당시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쌀 도매를 하셨는데 우리 부모님도 당시에 동대문구 쪽에 허름한 집 하나 마련하고 지냈을 때라서 서로 자주 왕래하며 다 같이 집에서 삼겹살도 구워 먹고,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지내셨다고 한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 부모님이 결혼하시고 내가 태어났을 때 안가 분도 그 시점에 결혼을 하셔서
자식을 낳으셨다. 결혼을 하고 서로 아이를 각자 낳고 나서 더욱 왕래가 잦아졌다고 한다.
2001년 돈독하게 잘 지낼 때쯤 안가분이 어느 날 아빠에게 연락이 오셨다고 한다.
점점 일이 힘들어지고 돈이 없어서 아빠한테 돈을 빌려달라는 연락을 하셨는데 당시 아빠는 그 친구분께 1000만 원을 빌려주셨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몇천만 원의 값어치에 달하는 금액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중에 안가 분이 한 장의 가계 수표를 아빠한테 하나 건네주면서 염려 말라는 말을 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가 은행을 가서 수표를 확인해 본 결과 그 수표는 이미 부도난 회사의 수표였다. 꺼림칙해서 그분께 전화해서 물어보니 이미 그 사실을 알면서도 본인이 그 수표를 건네주었다고 이실직고하셨다고 한다.아빠는 그 1000만 원을 빌려준 이후로 안가 분과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엄마도 당시에 안가 분을 좋게 생각하셨어서 아빠가 빌려준 그 돈에 관련돼서 아무 말도 안 하셨다고 한다. 그만큼 돈을 떠나 안가 분은 우리 부모님한테는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별말 안 하고 잘 지내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분의 연락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십수 년이 지나 어느 날, 안가 분의 연락처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아빠가 그 연락을 받고 그분을 다시 마주한 곳은 갑작스럽게도 장례식이었다. 바로 안가 분의 장례식이었다. 아빠는 부고 연락을 받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가셨다. 그리고 비통한 감정을 참아낼 수가 없으셨다고 한다. 아빠 입장에서는 보고 싶은 마음을 참고 기다렸는데 기껏 시간 지나 연락 온다는 것이 한 통의 부고 문자였으니 말이다. 후에 다른 친구분들께 들어보니 안가 분은 그동안 주변인들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신 채 술로 하루하루를 지새우시다가 떠나게 되셨다고 한다.
아빠는 그 1000만 원을 빌려주신 거에 대해 여전히 후회는 있다고 하셨다. 그 후회는 돈에 관련된 후회가 아니다. 만약에 그 돈을 안 빌려주었다면 그 친구분이 살아계실 동안 자주 만나며 술 한 잔 기울였을 텐데라는 후회이다. 그 돈이 아니었다면 그 친구가 느끼는 나에 대한 죄책감도 없었을 텐데라고 말씀하셨다. 빌려주어도 받을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그 1000만 원은 아빠의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남아있다. 안가라고 불리시던 그 분과의 추억도 함께 말이다.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 건 시간 지나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사춘기 시절에는 마냥 아빠만의 개그라고 생각하고 별생각을 안 했었는데 시간 지나 나도 친구가 생기고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되고, 이 안가에 관련된 이야기를 속으로 생각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관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돈과 우정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게끔 만드는 이야기였다.
인간관계는 언제나 어렵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주제 중에 하나가 인간관계인 거 같다.
우정이 깊을수록 상처는 크다. 정을 깊게 나눈 만큼 남들에게 느끼지 못하는 자잘한 것들에 대해 더욱 서운해하고 배신감을 느끼곤 한다.
그 서운해하는 대상이 내가 될 수도, 상대방이 될 수도 있다는 점들을 매번 의식하는 순간 관계는 서서히 멀어지는 것 같다.
영원한 우정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사람 일은 모른다라는 이야기들을 조언 삼아 들을 때면 사실 더욱 혼란스러울 때가 많기도 하다.
시간 지나 다양한 인간관계들을 접해보고 나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믿음을 어디까지 가져야 하는지 체크를 하고, 정을 쉽게 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기도 하다. 계산적인 사람이 된 것인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만큼 이해와 존중이 밑바탕이 되어 자연스럽게 서로를 인정해 주는 관계를 정말 소중하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다.오래 나아가는 관계로 지속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있지만 그 노력이 어떨 때는 크나큰 스트레스를 가져다준다.
모든 사람들이 다 맞을 수 없고, 본인 스스로 생각하는 이해의 기준도 다르기 때문에 노력보다는 자연스럽게 관계의 맺고 끊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적절한 거 같다.
만약 누군가에게 매우 큰 상처를 받았다면 이야기가 다르긴 하다. 문제는 그 관계 이후 트라우마로 인해 방어기제가 매번 작동하게 되어 다음에 있을 인간관계에 피해를 준다.
다가오는 사람을 거부할 때가 생긴다. 그렇다고 다가오는 사람을 매번 거부하는 것도 좋지는 않다.
사람은 홀로 설 수 없기에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치유 또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줄어들어서 쉽지만은 않겠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람을 맞닥뜨리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았을 때는 각자마다 이해관계는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본인의 탓으로만 생각해서도 아니 된다.
직간접적으로 해를 입힌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떠나서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단지 평소 인간관계에서는 상대방에게 이해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상대방을이해해보고 대화를 하다가 정아니다 싶을 때 관계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한 거 같다. 불교에서 말하는 핵심 용어인 시절인연을 떠오른다면 한편으로 마음 편하지 않을까 싶다.나 자신이 불안해하는 시점에 누군가와 멀어졌을 때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다가 상대방을 돌아보게 되면 그 관계가 왜 끝에 다다른 것인지에 관해 어느 정도 정답을 얻게 되는 거 같다. 생각에 대한 경험도 하게 된다.
본인의 잘못과 상대방의 잘못을 판가름해보는 것도 성장의 밑거름이 되어주는 거 같다.
항상 정답은 없다. 나중 가서 또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돈 버는 것보다 어려운 인간관계… 아마 죽을 때까지도 정답은 없겠지만 우선 현재 내 마음이 편한 관계가 가장 좋은 관계인 거 같다.
신뢰와 믿음, 이해와 존중 이 네 가지는 인간이 살면서 직면하는 가장 큰 도전 과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