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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말로 Dec 06. 2024

외할머니

사랑하는 우리 외할머니

나와 동생은 6살 터울인 남매이지만 유년시절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대부분 외할머니와의 추억이 가득 담긴 이야기들이다. 바빴던 부모님을 대신해 나와 동생이 유치원에 입학할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이따금씩 우리 둘을 돌봐주셨던 분이 바로 외할머니셨다. 우리 외할머니는 등이 심하게 굽으신 분이셨다. 허리가 그만큼 안 좋으셔서 늘 항상 뒷짐을 지고 다니셨고, 검은색 파마머리와 안경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이셨다. 티비 드라마, 영화에 가끔씩 나문희 선생님이 나올 때면 저절로 우리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외할머니는 평소 웃음이 많은 분이셨다. 나와 동생만 보면 항상 밝은 미소로 이름을 부르며 손을 꼭 잡아주시곤 했다. 편치 않은 몸이신데도 불구하고 지팡이 없이 두 다리로 30분 걸리는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며 우리를 돌봐주러 오셨다. 당시 외가댁은 아현동에 위치해 있었고, 우리 가족이 살던 동네는 약수동이었다.


지금은 큰 건물들이 많이 들어섰지만 높은 오피스텔 건물들이 없었을 당시 약수동 동네를 외할머니 손을 잡고 매일 돌아다녔다. 외할머니보다 키가 작았던 그때의 나는 약수시장에 계셨던 상인분들과 매번 정겹게 인사를 나누고, 시장 끄트머리 골목 안쪽에 있던 문방구에 가서 300원, 500원짜리 뽑기를 하기 바빴다. 외할머니는 항상 조그마한 동전지갑에서 동전을 몇 개 꺼내 내 손에 쥐어주셨고, 그 동전들로 신나게 뽑기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당시 약수시장 상인 분들과는 다 친근한 사이였다. 왜냐하면 규모가 크지도 않고 매우 소박한 동네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은 시장에서 걸어서 1분 거리인 화장품 가게를 운영하셨었다. 동네 분들 대부분은 내 이름을 알고 계셨고, 대강 화장품집 아들내미로 불리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몇몇 분들을 적어보자면 우리 가게 옆 노상에서 몇 가지 채소를 파시던 노부부 두 분, 그 건너편에는 열쇠가게 운영하시던 할아버지, 우리 가게 바로 옆에서 여러 벌 옷들을 들고 와 장사하셨던 아주머니 그리고 시장 초입에는 통닭을 정말 맛있게 튀겨주셨던 통닭집 할머니, 시장 중간에는 야채가게 운영하시던 할아버지와 시장 끄트머리에는 생선가게를 운영하셨던 아저씨. 어디 마트를 갈 필요도 없었다. 먹을거리들이 그만큼 넘쳐났던 곳이었기에 장을 보기 수월했다.


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점점 외할머니랑 키가 비슷해져 갈 때쯤 우리 동생이 태어났다. 당시 화장품 가게 안쪽에는 널찍한 공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손님들 피부 관리 마사지를 위한 큰 베드 두 개가 있었고 옆칸에는 비디오테이프가 들어가는 조그마한 티비 하나 있는 작은 방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항상 그 방에서 외할머니와 같이 티비를 시청하곤 했다. 외할머니는 갓난아기였던 동생의 기저귀를 갈아주며 열심히 우리를 돌보셨다. 엄마는 화장품 판매를 하느라 매장 카운터에 항상 앉아계셨고 아빠는 영업을 뛰고 다니셨다. 부모님이 일을 마치고 퇴근하시면 외할머니도 바로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떤 날에는 외할머니한테 장난감을 사달라고 졸라댔던 적이 있었다. 당시 바쿠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유행하면서 그 피규어 장난감을 갖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많이들 가지고 있었는데 나만 없는 것이 서럽기도 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 시장 골목 안 쪽에 있던 문방구로 가서 바쿠간 장난감을 사주셨다. 그 바쿠간 장난감 하나가 당시 가격으로 5000원이었는데 그때의 5000원은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다. 그래서 아빠 몰래 외할머니와 비밀로 하고 집에 가져와서 열심히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곧장 아빠한테 들켜서 엄청 혼났던 기억이 난다.


내가 외할머니 키를 넘어서기 시작하고 동생이 유치원에 들어갈 때쯤 부모님은 화장품 가게를 정리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셨다. 똑같이 약수동에 그 사업체를 꾸리셨는데 원래 살고 있던 아파트도 정리하고 회사가 있던 그 건물 옥상 옥탑방에 잠깐 살기로 하고 이사를 왔다. 외할머니는 그때도 꾸준히 우리를 돌보러 와주셨다. 옥탑방 올라오는 계단도 정말 가팔랐다. 항상 한 계단 한 계단씩 조심히 올라오거나 내려가시는 외할머니를 보며 걱정했었다. 옥탑방은 우리 가족 네 명이 옹기종기 붙어 간신히 잘 수 있는 좁은 곳이었다. 방 옆에 주방 겸 샤워실로 쓰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밥도 해 먹고 샤워를 했었다. 겨울에는 난로 하나로 버텨냈었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아빠는 눈으로 미끄럼틀을 만들어주었고 온 가족이 눈싸움하며 재밌게 옥탑방 생활을 했었다. 어느 날에는 병아리 두 마리를 청계천에서 사 와서 그 옥탑방에서 키웠었는데 한 마리는 중간에 병에 걸려 죽었고, 남은 한 마리는 거의 중닭이 될 때까지 키웠었다. 외할머니는 옥탑방에 오실 때마다 무럭무럭 자란 그 중닭을 극도로 싫어하셨다. 강아지는 몰라도 새는 무서워하셨다.

( 나중 가서 그 중닭은 친할머니 댁에 보내졌다. )


옥탑방에서 한 1년쯤 있다가 우리 가족은 같은 건물 4층으로 내려와 집을 옮겼다. 옥탑방보다는 넓어져서 정말 만족스러운 집이었다. 훨씬 집다운 집이었다. 그때는 옥탑방까지 안 올라와도 되는 외할머니를 보며 안심했다. 그 집에서 나는 잠깐 살다가 이내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 한 2, 3년 동안 방학 때마다 한국을 잠깐 오면 집에서 외할머니를 뵐 수 있었다.

그 당시까지도 우리 동생은 초등학생이었어서 외할머니가 낮에 자주 오셨었다. 가끔 외할머니랑 근처 분식집에서 점심을 먹을 때 중국 생활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할머니가 그 분식집에서 항상 시키시던 메뉴는 된장찌개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중국유학을 가있는 동안 한창 초등학생이었던 우리 동생 옆에 늘 같이 있어 주셨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옆에 늘 같이 있어주셨듯이.


나와 동생이 더 커가고 부모님 사업도 나름 번창하기 시작할 무렵, 약수동을 벗어나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외할머니가 전처럼 오시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중국에 있던 나를 제외하고 우리 가족이 명절날 인사를 드리러 가는 거 말고는 자주 찾아뵙는 게 어려워졌다. 그만큼 부모님도 사업 때문에 바쁘시기도 하셨고, 동생도 나름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 시기를 겪고 있었다 보니 못 뵙는 시간만 늘어가고 있었다. 나중 가서 가끔씩 외할머니가 약수동을 혼자 왔다 갔다 하셨다고는 들었다. 거기서 친해진 몇몇 분들이 계셨어서 그런지 혼자 가시면 상인 분들이 내 이름을 앞에 붙이고 “ 00 할머니 오셨네요.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나누셨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쯤 겨울방학 때 한국을 와서 외할머니를 뵈러 혼자 지하철을 타고 흑석동으로 간 적이 있었다. ( 외가댁이 중간에 아현동에서 흑석동으로 이사를 했다. )

유학하느라 그동안 제대로 연락도 못 드리고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이 너무 컸어서 꼭 혼자 가서라도 찾아뵙고 싶었다. 가는 날 당일 엄마한테 외가댁 위치를 듣고 외할머니께 직접 전화해서 도착하는 시간을 말씀드렸었다. 흑석역에 도착하고 내려서 근처 빵집을 들러 빵을 사고, 좋아하시던 떡을 몇 줄 산 다음, 아파트 1층 앞에 도착해서 전화를 드렸는데 외할머니가 직접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나를 반겨 주셨다. 추운데 안 힘들었냐고 하시면서 내 손을 어루만져주셨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다 크고 나서 바라보는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았다. 집에서 좀 있다가 외할머니랑 단 둘이 밖을 나와서 오랜만에 손을 잡고 근처 식당으로 갔다. 걸음걸이도 느려지시고 전보다 손에 힘이 없으셨다. 세월이 빨리 지나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식당을 가서 외할머니가 좋아하시는 된장찌개와 고등어구이를 주문했다. 밥을 먹는 와중에 ”제가 밥 살게요 할머니. “라고 하자마자 외할머니는 진짜 많이 컸다고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처음 보는 외할머니의 눈물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난 다음, 다시 손을 잡고 아파트 앞까지 모셔다 드렸다. 다음에는 동생이랑 같이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안아드렸다. 당시 차가운 겨울이었지만 같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골목길에서의 따스한 분위기들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시간이 좀 지나고 2019년 나는 중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을 들어왔다. 이래저래 맘고생으로 인해 병원을 다니느라 외할머니를 찾아뵐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고 2021년 6월 즈음에 나는 동생이랑 같이 외할머니를 다시 찾아뵈러 갔었다. 외할머니의 건강이 점점 안 좋아지신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치매 진행 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가끔씩 사람을 못 알아보신다고 하시길래 동생이랑 흑석동을 가면서도 혹시나 못 알아보시면 어쩌지 하는 걱정에 서로 안절부절못했었다. 동생과 나는 흑석역에 내려서 꽃집과 빵집에 들러 꽃다발 하나랑 케이크를 사들고 외할머니댁으로 향했다. 아파트 집 현관문 앞에서 작은 이모가 우리를 반겨주셨다. 외할머니는 그 옛날 아현동 시절부터 큰외삼촌이랑 함께 사셨다. 큰 외삼촌은 항상 먼 직장을 다니시며 출퇴근을 하셨기에 많이 바쁘셨고 가끔씩 작은 이모가 외할머니를 챙기러 와주셨다.


외할머니께 조심스럽게 인사를 드리니 처음에 나랑 동생을 못 알아보셨다. 작은 이모가 옆에서 우리 이름을 크게 말해주면서 외할머니가 기억나시게끔 도와주셨다. 외할머니는 잠시 있다가 우리를 알아보시고는 슬프게 우셨다. 동생도 눈물을 엄청 흘렸다. 옆에 있던 나는 애써 덤덤하게 웃는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꽃다발을 건네 드리면서 같이 사진도 찍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외할머니는 예전과 똑같이 밝은 미소를 지으셨다. 하지만 그때의 모습이 우리가 본 외할머니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었다.


2021년 말에 외할머니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치매 증상으로 인해 전문적인 치료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코로나가 더욱 극심해져 병문안을 갈 수 없었다. 오로지 전화로만 인사를 드려야 했다. 어느 날 엄마가 외할머니랑 통화하시다가 나한테 전화를 바꿔주셨는데 그때 할머니는 내 목소리를 듣고 못 알아들으시다가 내가 이름을 크게 말하니 이내 다시 알아들으시고는 보고 싶다고 말을 하시면서 울먹거리셨다. 나는 곧 보러 가겠다고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 그 통화도 외할머니와 나눈 마지막 통화였다.


2022년 4월 15일 늦은 저녁, 엄마에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었다. 우리 가족은 다음 날 4월 16일에 다급히 장례식장으로 가서 상복으로 갈아입고 조문객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외가 쪽 가족분들 전부 와계셨다. 외할머니 영정 앞에서 절을 드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감정이 슬퍼야 하는데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상황이 갑작스러워서 내 감정이 지금 어떤지도 판가름 낼 수 없었다. 다들 전부 슬프게 우시는데 나만 덤덤했다. 그냥 살아계실 때 영정 사진 이쁘게 한 장 찍어드릴 걸 하는 후회만 가득했다. 나는 우리 엄마가 가장 걱정이었다. 우시느라 지칠 대로 지치신 듯했다. 늦은 밤이 되고 부모님을 포함해 외가 쪽 식구들 대부분 주무시러 들어가시고, 나는 외할머니 영정 앞에 계속 누워서 멍 때리기만 반복했다. 그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냥 잠이 오지 않았다. 뒤에서는 작은 이모부와 큰외삼촌 그리고 다른 친척분 몇 분이 술 몇 잔 걸치시며 새벽까지 대화를 나누셨다. 나는 그날 밖에 나가서 담배를 셀 수 없이 많이 폈다. 친구들한테도 다 끝나고 연락하겠다고 카톡을 남겼었다. 평소에 대화 몇 마디 나누지 못했던 외삼촌과 이모부랑 그날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잠이 계속 안 오다가 아침 7시쯤 되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러고 2시간 정도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니깐 얼굴에 여드름 세 개가 뻘겋게 나있었다.


입관하실 때 엄마하고 동생 나머지 가족들은 마지막 모습을 보러 들어가셨고 나는 아빠랑 가만히 빈소를 지켰다. 뭔가 입관할 때의 모습을 도저히 볼 엄두가 안 났다. 발인하는 날에 나를 포함해서 아빠, 친척형 몇 명 그리고 외삼촌, 이모부가 함께 관을 들었다. 그리고 다 같이 서울 추모공원으로 향했다. 관을 운반한 뒤 화장이 시작되고 휴게실에서 가족들끼리 모여 앉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유치원 다닐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같이 한마음 한 뜻으로 두 분이 다시 만나 손잡고 함께 돌아다니시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이 끝나고 유골함은 큰외삼촌이 들었다. 나는 가족들 맨 앞 선두에서 영정을 들고 걸었다. 이후 납골당으로 향했고 모든 장례는 마무리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고 친구랑 술 한 잔을 하게 되었다. 호프집에서 맥주 한 잔 하는데 어떤 가족분들이 우리 옆 테이블에 앉으셨다. 내가 앉아있는 자리 바로 옆에 어느 할머니께서 앉으셨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장례식에서 조차 울지 않았는데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듯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몰랐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쌓였다가 터진 듯했다. 친구 앞에서 우는 모습을 처음 보여준 거나 다름없었다. 그날은 진짜 엉엉 울었다.


현재 2024년 막바지 겨울, 외할머니가 떠나신 지 어느덧 2년이 훌쩍 지났다. 가끔씩 어디 돌아다니다가 할머니분들을 보면 외할머니가 문득 생각이 난다. 지금과는 다른 모습인 약수동을 요즘에 가도 그때 그 시절이 많이 떠오른다. 그 옛 모습들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저절로 머릿속에 그때의 풍경들이 그려진다. 어린아이인 나는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여전히 그 동네 풍경 속을 걸어 다니고 있다. 이제는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그때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인사를 건넨다.


꼭 열심히 살게요! 먼 훗날 다시 만나요! 사랑해요 외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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