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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 Mar 22. 2022

21명의 사람을 만났다


오늘 동대문구 창업가 지원 프로그램 첫 날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한 장소에서 20명이 넘는 사람들을 만났다. 학창시절, 대학교 때까지도 당연했던 풍경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 지나서야 깨닫는다. 만약 지금의 마음을 가지고 다시 대학교 강의실로 돌아갈 수 있다면, 수업 말고 어느 누구보다 일찍 나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돌아보니 그땐 같은 대학 학생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마음에 두껍고 기다란 줄 하나가 연결되어 있었고, 한 쪽에서 잡아당겨 주기만 하면 가까워질 수 있는 사이였던 거다.


수업 첫 날이면 지겹게도 시키던 자기소개. 난 그때도 재미있었는데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 그러나 오늘은 22명이서 서로의 인생을 소개했고, 다들 당신의 삶이 궁금해 못 참겠다는 표정이었으니. 그 오랜만의 풍경을 본 것만으로도 값진 하루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투르게 마이크를 잡고, 여기서 무언가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동자 속에서 삶의 활력도 느꼈고. 인스타그램, 유튜브에 이어 메타버스가 사람들을 다 태워서 새로운 가상 공간으로 데려간다 해도. 나는 이 시대의 구식이라 여겨지는 면대면 만남을 지속하며, 한 명 한 명 느리더라도 데이터화 할 수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22명의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특징적인 것들을 메모해 놓았는데. 여기에는 내가 이해한 문장 한 줄로 요약해 보려 한다.


1. 마이웨이 : 환갑의 나이. 아이들을 키우며 바삐 마감한 인생 1막을 뒤로하고, 엄마가 아닌 인생으로서의 2막을 준비하는 패셔니스타. 


2. 코스모 : 현명한 쇼핑을 지향하는 젊은 엄마, 하지만 엄마 자리도 휴식이 필요해.


3. 키라 : 빈티지 옷을 좋아하는 요조숙녀. 


4. 라일락 : 도시에 살지만 도시를 자연으로 만들고 싶은 보라색 꽃 한 송이.


5. 식빵 : 2권의 책을 낸 작가이자 엄마. 식빵이란 필명은 굽지 않았을 때 식빵의 식감과 우유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부드러운 인상의 식빵님을 소개하는 데 알맞다.


6. 요고 : 사람들을 멀리서 천천히 관찰하는 빨간색 호랑이. 사람을 관찰한다는 것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7. 킹메이커 : 손이 빠른 엄마. 다들 케이크를 즐길 때 케이크 위의 토퍼를 보며 감동을 느끼는 사람.


8. 세니 : 예고를 나와 카드사를 거쳐 쇼호스트를 꿈꾸는 자존감 요정. 짐작컨대 다른 사람들은 곧잘 칭찬하면서, 꾸준하지 못한 자신을 깎아 내린 시간도 길었을 것 같다.


9. 엽집 : 이름이 아니라면 단명했을 사주를 가진 남자. 중국으로 용감하게 건너가 이동식 떡볶이 장사도 하고, 저지르고 보는 배낭여행을 통해 중국어라는 재능도 남았다. 제 살 깎아먹으며 파는 과일이 안타까워 마케팅을 배우고자 하는 선량함도.


10. 모디 : 옷걸이가 좋으며 패션 사업을 준비하는 키 큰 청년. 저 키에 저 몸이면 나같아도 패션 사업 하고 싶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생엔 나도 190센치의 건장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11. GJ(젊은 진수) : 독일어 교육, 3d 프린팅을 거쳐 현재는 해외 구매대행과 먹스타를 운영하고 있는 여자. 공통성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진로 이탈이 잦은 것을 보니 예상컨대 엠비티아이 enfp 일 것이다.


12. 서도도 : 내성적인 관종. 백스테이지에 서 있는 것이 행복한 사람. 내가 아닌 내가 만든 옷으로 나를 보여주련다.


13. 동아 : 마을 사람들을 좋아하는 예술가. 소소하게 그림을 그리지만 소소하지 않은 돈까지 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라는 꿈이 있다.


14. 애때 : 보미라는 본명으로 평생 봄, 스프링 엇비스무리한 별명만 가졌다. 이제는 인생에 새로운 계절을 찾고 싶다며 외국어로 '여름'이라는 뜻의 별명을 지었다. 명문대를 휴학하고 주짓수, 스쿼시, 베드민턴을 배운다. 나랑 동갑에 집도 300미터 거리다. 고려대 다닌다길래 집이 가까울 것 같아 버스 같이 타자고 먼저 말 걸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옆에 산다는 것을 알고는 앞으로 함께 택시를 타기로 했다. 하루만에 동네 친구가 되었다. 


15. 누키 : 캐나다에서 이제 한국에 정착한 새싹미식가. 왜 한국을 영영 떠나지 않았는지 궁금해 진다.


16. 해바라기 : 친구와 해외 여행을 하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바라기 밭을 보게 된 엄마. 그 풍경을 잊지 못해, 아이들을 키우고 언젠가 꼭 여기에 다시 오자는 약속을 했다.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잘하지만, 해바라기와 달리 엄마를 향하지 않는 아이들을 키운다.


17. 피리언니 : 부는 걸 좋아하는 사람. 엄마라는데 얼마 전에 1인가구로 독립을 하셨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불 수 있는 악기들은 다 배워보신 것 같다. 난 이렇게 세부적인 것을 잘하는 사람은 또 처음 본다. + 살사춤 배우는 사람도 ... 


18. 하은맘 : 나를 소개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는 '하은맘'이라고 소개하는 젊은 엄마. 우리 엄마도 자신을 저렇게 정의하였을까? 웨이트 트레이너로 일했고, 여전히 운동을 좋아한다.


19. 어흥 : 계획은 기가 막히게 세우지만 실천은 못하는 프로 계획러. 맛있는 걸 소개하면, 듣고 있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가보고 싶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린을 좋아하는데, 그린에는 오렌지 색이 또 잘 어울린다며. 자신은 오렌지 색이 좋단다. 


20. 당근 : 강아지와 함께 사는 삶이 행복한 당근. 당근이 왜 좋을까 ... 맛있는 게 넘치는데. 유아교육, 사회복지사를 거쳐 진로 유랑을 여전히 끝내지 못했다. 유랑의 과정에도 그 끝에도 강아지가 함께하길 꿈꾼다.


21. 아롱별 : 할머니, 엄마, 이모의 피를 물려 받아 손재주가 좋은 경력 단절 엄마. 쉬고 있는 손이 다시 일해야만 한다고 꿈틀거렸을 것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 하늘색을 좋아한다.


22. J : 요즘 말로 '힙'해 보이는 대학생. 인테리어 디자인, 전시 디자인을 좋아한다. 자기소개를 너무 짧게 끝내서 궁금한 것만 더 생겼다.




똑같은 사람이 없다. 똑같은 사람이 없다는 건 아주 중요한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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