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타인과 메모지

by 노란옥수수

아무 이야기나 쓰자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갓 장편 소설 한 편을 탈고한 참이었다. 에디터와의 치열한 기싸움을 끝내고 심신이 지친 참이었다.

“아무래도 글테기가 온 것 같아.”

“어머나, 저런. 걱정이네.”

술을 따라주며 친구 재형이 말했다. 나는 재형을 째려보았다. 무시무시한 내 시선을 받고 재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문제야? 한껏 걱정해 주고 있는데.”

“네 말투가 제일 문제지. 좀 진짜로 걱정하는 말투로 말을 해라, 응?”

“야, 말이라도 걱정해 주는 게 어디냐? 너무 많은 걸 바라네, 꼴랑 소주 한 잔 사 주면서.”

“진짜 이러기냐? 10년 우정이 이거밖에 안 돼?”

“너야말로 10년 우정 활용해서 네 감정 받아달라며 상담료로 소주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당장 양주 시켜.”

“발렌타인 시킨다?”

재형은 정말로 발렌타인을 시켰다. 술이 도착하자마자 몇 년이나 만나지 못한 연인에게 하듯 다급하게 달려들더니, 재형의 눈이 급격히 온화해졌다.

“그래. 글테기가 온 것 같다고?”

“아, 진짜 싫어.”

“친구야. 그냥 말해 봐. 구체적으로 네 상태가 어떤데?”

“글을 쓰는 게 다시 어려워. 빈 화면 앞에 앉으면 눈도 침침해지고 손도 무겁고, 무엇보다 잠이 쏟아져.”

“눈이 침침해지면 눈을 감으면 되고, 졸리면 자면 되지 않니? 너 당장 급한 마감도 없다며.”

“육회랑 연어도 시켜.”

“위기감이 느껴질 수도 있지. 너는 전문 작가니까. 글로 밥벌이를 하는 너한테,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하면 당장 막막하고 답답해지는 게 당연해.”

“이제야 GPT랑 비슷해지는군. 계란말이도 시켜.”

“하하. 너 진짜 핵심을 찔렀어.”

재형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보름달이 동그랗게 뜨던 눈을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만들었다. 나는 재형의 익살에 결국 웃음을 픽 짓고 말았다. 하지만 곧

“자. 그래서, 네 생각에는 그 이유가 뭐 같은데?”

“몰라. 그래서 답답해. 지금까지는 이런 적이 없었어서 너무 당황스러워. 이전에는 마감이 끝나도 다음 마감을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해. 내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어쩌면 이대로 글을 영영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너무 많이 들어.”

“그게 문제였군. 걱정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그러면 이렇게 말해주면 네 마음이 어떨지 모르겠다. 정확히 1년 전, 네가 지난 주 마감한 그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도 너는 나를 불러냈어. 그리고 말했지.”

“뭐라고 했더라? 아냐, 말하지 마!”

내가 다급히 일어나 재형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재형이 훨씬 빠르게 내 손을 피하고 입을 놀렸다.

“‘재형아, 나 글테기인 것 같아. 나 소설 쓰는 법을 완전히 까먹은 사람 같아.’”

“맞다. 그때도 부른 게 너였지.”

나는 창피해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육회를 싹 해치운 재형이 큐브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재형이 먹는 모습을 한참이나 보았다. 그 많은 음식이 재형의 입속으로 들어가서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발렌타인 17년산까지. 그제야 술값이 얼마나 들지 대략 계산이 되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안 먹냐?”

“입맛 없어. 너 먹는 것만 봐도 입맛이 싹 달아나.”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쓴 술을 잔에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술이 썼다. 나는 중얼거렸다. 나 자신에게 하는 건지, 재형에게 하는 말인지 스스로도 헷갈렸다.

“이게 대체 얼마야. 이 돈이면 그냥 상담사를 썼겠다.”

“상담사는 먹는 거 권하진 않아. 상담사인 동시에 먹방러라고 생각해. 2명분 인건비를 한 번에 낸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말은. 넌 진짜 물에 던져 놓아도 입만 동동 뜰 거야.”

“그렇게 아무 말이나 듣고 싶어서 나만 부른 거잖냐. 다른 애들은 다 자기 말만 실컷 하다 가는데, 나는 네가 말할 때까지 조용히 술이랑 밥만 먹으니까.”

“네가 뭘 알아.”

“모르긴 뭘 몰라. 너 지금 '아무것도 안 쓰고 있는 나'를 못 견디는 거잖아."

재형이 스테이크를 씹으며 툭 던졌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재형을 보았는데, 재형은 내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스테이크 접시에 올라간 아스파라거스 두 개를 포크로 단숨에 찍었다.

"전작 탈고하고 일주일도 안 됐어. 뇌도 좀 쉬어야 글을 싸지, 너는 뇌가 무슨 무한동력 엔진인 줄 아냐? 지금 네가 느끼는 건 글테기가 아니라 그냥 '정상적인 방전'이야."

“하지만 나는 방전되면 안 된단 말이야.”

“왜 안 돼?”

“한 번 방전되어 버리면 다시는 켜지지 않을지도 모른단 말야. 나는 너무 긴 시간 동안 글을 쓰고만 싶어 하고, 실제로는 쓰지 않아 왔어. 그러다 간신히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얻었는데, 이대로 꺼지면, 다시 켜질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날지 알 수 없다고.”

“정말 쓸데없는 고민을 하고 있었구나, 너.”

“좀 친절하게 좀 말해라.”

발렌타인 술병을 가져가 버리자, 재형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도로 빼앗아 갔다.

”너 나한테 얼마어치 술이랑 안주를 얻어먹고 있는지 아냐?”

“아 참.”

어느새 위스키병의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분명 새 병으로 주문했는데.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술병과 재형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주었다. 재형은 씩 웃으면서 한 잔을 가득 따랐다. 그리고 내 잔에도 가득 따라 주었다.

“일단 너는 책임감이 강해서 여기에서 멈출 리가 없어. 너 올해 이제 겨우 한 권 탈고했을 뿐이잖아. 그거 말고 올해 안에 넘겨야 하는 원고가 몇 개야?”

“윽, 세 개.”

“이미 시놉시스가 다 나와 있을 것 아니야.”

“트리트먼트는 아직 하나도 못 썼어.”

“모든 작가가 트리트먼트를 먼저 쓰지 않아. 너야 철저하게 트리트먼트를 짜고 쓰는 타입인 건 알지만, 간단한 시놉시스만 있어도 너는 할 수 있잖아. 그렇게 작년에 중편 하나 넘기지 않았냐?”

“그건 어쩌다 운이 좋았어.”

“넌 계속 운이 좋을 거야. 왜냐, 너는 그냥 운이 좋아서 작가가 된 놈이 아니라 실력이 좋은 녀석이거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운만 좋은 녀석은 반드시 한계가 와. 그래서 오래갈 수 없어. 하지만 너는 벌써 몇 년째 나한테 발렌타인이며 잭 다니엘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 주고 있잖아.”

“그 운이 곧 끝나가는 걸 수도 있잖아. 이번에는 정말 이상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그리고 글을 쓰는 게 재미있지가 않아.”

입맛이 텁텁해졌다. 그래서 단숨에 잔을 비우고 말았다. 머리가 찡하며 울리고 몽롱해졌다. 동시에 두개골 속에서 전구가 탁 켜진 것 같은 느낌이 났다. 나는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걸 다시 좋아하게 되었을 때 신났어. 내가 소설을 완성할 줄 안다는 것을 깨달은 날 설렜어. 다른 일을 그만두고 글만 썼는데도 내 통장에 잔액이 줄어들지 않게 되는 것을 본 날 뿌듯했어. 하지만 이제는 아냐.”

“뭐가 아닌데?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자연스럽게 한 병 더 시키는 재형을 노려보았다. 재형은 술을 채워주며 재차 물었다.

“뭔데? 지금 기분이 어떤데?”

“무서워. 내 글을 보고 실망할 독자들이. 내 글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고 있을 독자들한테 내 글을 보여주는 게 무서워.”

“왜 독자들이 벌써 실망할 거라고 생각해? 아직 다음 원고를 시작도 못 했다면서. 게다가 벌써 몇 권이나 책을 냈잖아.”

“너 황금 뇌를 가진 사나이라는 이야기 아냐? 태어났을 때부터 뇌가 황금인 사나이였는데, 어른이 된 이후, 이 뇌를 팔아 흥청망청 써 버려서 마지막에는 뇌가 텅텅 비어 죽었대.”

“얼씨구.”

“나도 그런 비슷한 거 같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아 왔던 영감, 소재, 그런 참신한 것들은 이미 애초에 다 써버리고 작가로서 내가 가진 역량이라는 것이 텅텅 빈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말했잖아. 종이 앞이든, 컴퓨터 앞이든, 글을 쓰려고 앉으면 아무 생각이 안 나. 뇌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그냥 잠만 와.”

“그게 문제라는 거지? 쓸 것이 생각이 안 난다는 거. 그러면 써야 하는 게 뭔지 옆에서 알려 주면 쓸 수 있을 것 같냐?”

“그게 뭔 소리야?”

재형은 자기 가방에서 메모지를 하나 꺼냈다. 그리고 점원에게 말해 펜을 빌렸다. 뭔가 휘갈긴 후 재형이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무 이야기나 쓰자고 생각했다.]

“이게 뭐야?”

“소설의 첫 문장. 내가 너한테 알려 주는 거야. 이제 다음 줄을 네가 써 봐.”

“됐어. 뭐 하는 거야.”

“왜. 옛날에는 쓰는 것이 그냥 재미있었다며. 그건 옛날에는 쓰는 것이 너한테 놀이였다는 거지. 그런데 지금은 쓰는 게 일이 되니까 지루해지고,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겨서 두려워진 거야. 그러니까 다시 쓰기를 놀이로 돌려놓아야 하는 거야. 자, 놀이라고 생각해 봐.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이어 보라고.”

나는 그 말에 혹해서 메모지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아무’라는 이름의 그 사나이의 뇌는 황금으로 되어 있었다.]

재형이 그 아래 문장을 이어 적었다.

[아무는 자신의 황금 뇌를 팔아서 흥청망청 살았다.]

“야, 아까 내가 한 말이잖아.”

“어때. 넘어가.”

[그러던 어느 날, 한 여자가 아무 앞에 나타났다. 아무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아무는 당장 여자에게 구애하기 시작했지만, 여자는 도도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말했다.]

“뭐라고 말했는데?”

“그걸 바로 네가 써야지. 자. 네 차례야. 다음 이야기를 어서 써 보라고.”

재형이 재촉했다. 나는 메모장에 정신없이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무심코 손등으로 볼을 스치다, 내 볼이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달은 것도 잠시, 나는 이야기 적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유한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이 좋아요. 당신이 팔아넘겼다는 황금 뇌를 모두 당신 머리에 돌려 놓아봐요. 만날지, 어떨지, 혹은 당신을 사랑해 줄 지는 그다음에 판단할게요. 자, 움직여요. 내 사랑을 받고 싶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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