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
올해는 비가 내렸다 말다, 날씨가 통 이상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샌가 여름은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 앉아있을 거다. 나는 계절 중 여름을 가장 아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름을 생각하면 아득히 떠오르는 여름의 촉감은 분명히 그립기도 하다.
내가 간직한 여름의 기억들은 모두 타지에서의 경험이다. 여름이 '방학과 휴가의 계절' 아니랄까, 그 비일상성이 섞인 여름이 기억은 휘발되고서도 뇌리에서 특별하게 추억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아련하게 내려앉는 추억은 기숙학교에서 보낸 고등학교 시절의 여름이다. 학기 중 몰아치는 시험과 수행평가에서 벗어난 여름 방학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오전엔 수업 몇 가지를 듣고, 오후에는 자율적으로 공부하거나 선택적으로 수업을 들었다. 원한다면 여름 방학 동안 설치된 간이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여름 매미 우는 소리가 한가로이 교정에 퍼지고, 농구 코트는 조용히 뙤약볕에서 달아올랐다. 그리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푸르게 반질거리고 있었다. 태연자약하게 그런 장면을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는 느슨한 오후들이 여름엔 있었다.
"영화 안 볼 거야?"
"응, 이거 해야 해서 너네끼리 봐."
여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영화 제작 동아리의 회장이었던 반 친구가 시나리오 한 편을 써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연극부에서든, 문예창작부에서든, 그 외에도 어디서든 글을 쓰곤 했다. 그래서 그 요청을 쉽게 승낙했다.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할 단편 영화 시나리오였기에 동아리원들에게 시나리오 글감이 될만한 아이디어를 모았다. 그리고 룸메이트 친구들이 시험이 끝난 기념으로 영화를 다운받아 볼 때도 옆에서 시나리오를 쓰는데 골몰했다.
이틀 만에 완성한 초고. 부족한 작품일 거라는 생각에 피드백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첫 페이지의 최상단에는 "초고는 쓰레기다"라는 문구를 넣어 시나리오를 배포했다. 그리고 시나리오는 원고 상으로 수정될 새 없이, 촬영과 동시에 변주가 이루어졌다.
각 장면에 맞는 장소를 찾아가 꾸몄고, 때로는 선생님을 섭외해 연기를 부탁드렸다. 반 친구가 우연히 작곡한 노래를 선보였을 때에는, 영화에 넣으면 딱이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사용 허가를 구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영화제 출품 후 수상은 하지 못했고, 지금 봐도 그 작품은 엉성하고 어설프다. 그래도 그때를 떠올리면, 좁은 세계에서 날개를 퍼덕이기 위해 꿈틀대던 몸짓을 보는 것 같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이 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길 때도 있지만, 학교는 이미 신입생 후배들의 공간으로 바뀐 뒤이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내게 주어진 나의 오늘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래서 더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내 안에 그런 여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