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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② | 하나하나 잘 닫아가는 과정

by 휘자

내게 있어 진로란, 100개의 문을 닫아가는 과정이다.


같은 과 동기가 어느 날 뜬금없이 이중 전공으로 심리학과를 선택했다. 1년 반 동안 공부해보더니 어느 날 과방에 와서는 "심리학은 나랑 안맞다는 걸 알게 되어서 너무 유익한 시간이었다"라고 웃으며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구나, 나랑 맞지 않는 것을 알게되는 것도 유익한 거구나!


내가 잘하는 것 한 가지를 찾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경험해보지 못한 게 얼마나 많은데 이 작은 경험의 풀 속에서 어떻게 내가 원하고, 잘하고, 쫓아갈 한 가지를 단 번에 정할 수 있겠나. 동기의 말을 듣고 인생은 하나하나 '닫아가는 과정' 즉 원하는 것을 향해 좁혀가는 과정으로 접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실패해도 실패가 아닌 것이다. 문을 닫았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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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내 앞에는 수백개의 문들이 있다. 이 문들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닫아가는 거라고 생각하면 뭔가 괜찮아지는 것 같다. 특히 26살에 내가 제대로 닫은 문이 있다. 문을 잘 닫고 보니, 그 다음 문을 닫는 건 더 쉬워졌다.


닫은 문 1. 대학원 진학 후 한 학기만에 자퇴하다

나는 역사를 전공했다. 다른 과목에 비해 해석의 여지가 많은 과목이다보니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정권에 따라, 가르치는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 같은 정보도 다르게 전해졌다.


배워도 배워도 뭐가 진실인지 헷갈리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럼 내가 직접 역사서를 읽고, 원문을 앞에 두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판별해보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선택한 전공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이어 같은 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제야 내가 이전부터 꿈꿔왔던 - 직접 읽고 해석하고 판별하는 - 그걸 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그렇게 되려면 박사 과정은 밟아야했고, 우리 학교에서 박사까지 따려면 석사 최소 4년, 박사 10년.. 내 젊은 청춘을 모두 쏟아야 가능했다. (과 특성상 유학도 없고, 졸업이 매우 어려움)


그 정도로 이 과목을 좋아하거나 사랑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막연히 어릴 때부터 바라왔던 것이었고, 다른 잘하는 게 없어서 현상유지를 해왔던 것일 뿐이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게 무서워서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흐린 눈 하고 있던 진로 문제에 대해 이제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왔음을 직감했다.


이즈음 내가 정말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있는 '무엇인가'를 생산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들었다. 내 노동력을 돈주고 사줄 만한 곳이 있을까, 난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인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 능력이 돈이 된다는 걸 인정받고 증명받고 싶다. 그래서 패배자가 된 듯한 이 너절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다.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미 뜬 마음과, 사회의 구성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잔뜩 부푼 상태라서 딱 한 학기 다닌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퇴를 했다.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고 나니 몇 백만원 치 빚이 생겼고, 아직도 500만원 넘게 남은 학자금이 있지만 인생에서 정말 큰 교훈을 얻었던 시간이었다.


자퇴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 갑자기 6년 간 나를 감싸고 있던 '학교'라는 울타리가 사라졌음을 실감했다. 얼마나 무섭고 또 얼마나 설레던지. 이제야 제대로 하나의 문을 잘 닫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꽤 비싼 돈과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첫 번째 문을 제대로 닫으니 그 다음 문은 조금 더 빨리 잘 닫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문 닫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그리고 몇 개의 문을 닫고 비로소 들어가게 된 문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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