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급이 주는
지난 글에 이어 -
인생도, 진로도 결국은 하나하나 '닫아가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돌이켜봐도 20대 때 잘한 것은 내가 아직 너무 어리고, 그렇기에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젊음과 청춘을 기꺼이 낭비해도 된다는 것을 알았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이거 아닌 것 같은데.. 느낌이 오면 용기있게 포기하고, 이거 재밌을 것 같은데.. 싶으면 과감하게 시작해버렸다.
닫은 문 2 - 영상 업계
어릴 때 글 잘쓴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그럼 드라마 작가나 해볼까? 대학생 때 유튜브 같은 콘텐츠 만드는 것도 꽤 잘했었는데 pd를 해볼까? 이런 단순한 동기로 국비 지원을 받아서 신촌에 있는 영상 아카데미에 등록했다.
이왕 대학원 때려치고 나온 거 열심히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한 여름 폭염을 뚫고 겨우 도착한 학원 입구, 지나치게 낡은 건물, 간판, 입구를 보자 한 순간에 기대감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뭘 제대로 가르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강의실을 찾아 들어가보니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뭔가 하긴 해야겠는데 뭘 할지 모르겠는 사람들의 총집합체. 애매한 열정과 더운 여름이 만나 2주도 지나지 않아 탈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강사진들도 일부러 겁을 주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오래 못할 놈들은 빨리 떨어져나가라는 식.
2개월 간 시나리오 쓰는 법, 콘티 짜는 법, 기본적인 촬영 조작법, 그리고 방송계의 현실까지 하나하나 배웠다. 그리고 더이상 여기 있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동적인 결정이라기보다 여러번 자문했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배울 수 있는 걸 다 배운 것 같아? 아쉬움이 남지 않겠어? 모든 질문에 yes yes yes로 답하는 나를 보며 시간 낭비 그만하고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닫은 문 3 - 광고 업계
영상 아카데미를 그만둠과 동시에 마케팅 회사 인턴으로 입사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생 광고 업체였다. 그곳의 실장님은 광고 업계에서 꽤 잔뼈가 굵은 분이셔서, 10명 남짓 작은 광고 회사였지만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큰 고객사들이 많았다.
마케팅 인턴으로 3개월간 일하며 처음으로 고객사와 메일도 주고받아 보고, 메일에 정해진 양식이 있어서 마지막에는 꼭 '감사합니다 000드림' 으로 마무리 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또 vlook up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엑셀의 위대함을 새삼 느끼기도 하고 대기업이 광고 외주를 어떻게 맡기는지 왜 광고 업계가 '을'인지 체감했다.
나는 이곳에 다니는 내내 퇴근 후 집으로 가지 않고 꼭 챕터라도 영어공부를 했다. 서랍장 첫 칸에 토익책을 넣어두고 다녔다. 아직 내가 뭘 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엔 어떤 환경으로 가야할지 명확했기 때문에 잊지 않으려고 더욱 공부하는 데 열심이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는 곳이었다.
하나, 사람들이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곳에 간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회사를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
둘, 내 결과물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고 '개선'할 수 있는 환경으로 간다. 광고 회사이다보니 만들어서 넘겨주면 결과는 책임지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겠다는 욕심이 갈수록 떨어지게 되었다.
셋, 데이터를 더 많이 더 자주 다루는 곳에 간다. 콘텐츠는 사람마다 반응이 갈리는데 이를 정량적인 지표로 평가하고 개선하려는 환경에 가야 실력이 늘 것 같았다.
26살 드디어 열게된 문, 첫 직장
취준생 신분으로 돌아와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원 준비를 했다. 내가 원하는 직장의 기준이 명확해지자 취준 생활이 괴롭기보다는 기대가 되고 즐거웠다. 그리고 1개월 뒤, 위의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첫 직장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JD부터 가슴 설레게 하는 키워드가 다 들어있었다. 데이터, 최적화, 개선, 콘텐츠 ... 내가 잘 해온 것 50%, 내가 잘 하고 싶은 것 50%가 잘 버무려진 공고였다. 꽤 탄탄하게 성장해온 IT 유니콘 스타트업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자주 쓰는 앱 서비스였고 회사 리뷰도 좋았다.
1시간 30분, 진땀나는 인터뷰를 끝내고 일주일 뒤 합격 통보를 받았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이 정말 다 있는 회사였고 동료들도 너무 좋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어느새 입사한 지 4년차 고인물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내 동료들이 너무 좋고 자랑스럽다.
일하는 게 너무 재밌어서 자발적으로 야근도 하고, 내가 일하면서 배운 것들이 휘발되는 게 아쉬워서 블로그와 브런치를 열심히 썼다. 갑자기 회사 자랑이 된 거 같지만, 내가 자랑스러운 부분은 그동안 무서워도 하나하나 용기있게 잘 닫아왔기에 내가 들어가야할 문을 찾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정말 하고 싶은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솔직하고 본능적으로 선택해온 과정이 내 자산이고 내 힘이라는 걸 느낀다. 30대가 되고도, 40대가 되고도 이 감각을 잃지 않고 싶다. 아니 잃지 않겠다.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후회가 없었다. 나는 20대 내내 이 간단한 진리를 배워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