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의 실마리

by 보통사람

어릴 때부터 엄마는 내게 말했다.


"아들아.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어."


특히나 초등학생이던 내가 시험날 엄마에게 "백점 맞아 올게" 이 소리를 할 때마다 듣던 말이다.


나는 백점 맞을 자신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백점을 맞지 못하더라도 큰 소리르 쳐야 내가 작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마 나는 겸손하다 못해 자신감이 작아지면 고개를 너무 숙여버리게 될까 봐 오히려 자신 있는 척 큰소리를 치고 다녔던 것 같다. 내가 갖고 있는 태생적인 내성적 성격을 감춰보려던 나름의 시도였던 셈이다.


사기를 당하고도 애써 그 현실을 외면하고.


'아 이거 미실현 이익이야 언젠가는 받을 수 있는 돈이니깐 괜찮아'


라고 현실을 부정하던 것도 시험 백점 맞아올게라는 외침과 비슷했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면 다시 고개는 빳빳하게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가슴 한편은 항상 찝찝했고 그 정도는 더 커져갔다. 자존감을 지켜보기 위해 현실을 외면해 오던 방식은 틀렸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빌려온 책을 한 줄 한 줄 읽어오면서 확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기 계발서에 쓰여 있는 빼곡한 글씨를 내면화하는 시간을 밤마다 가졌다. 혼자 메모하며 좋은 구절을 되뇌었다. 가족 모두가 자고 있는 캄캄한 밤에 좋은 구절을 되뇌고 있을 때면 가슴 한편이 뜨거워지기도 했고, 털이 곤두서기도 했으며 혼자 눈시울을 붉히며 희망 섞인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다.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던 내가 도서관에 가면 자기 계발서를 먼저 빌렸고 거기에 쓰여 있는 말들을 삶 속에 녹여내고 싶어 졌다. 그래야만 아들의 철없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많은 과제가 내 앞에 놓여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나를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제였다. 어려운가 쉬운가. 나는 이미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2017년에서 2018년으로 넘어가던 해에 나는 사기를 당한 것만큼이나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내가 살 집이 없다는 거였다. 당시에 우리 가족은 2015년에 이사와 살던 34평 신축 신혼집에서 나와 24평 구축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좁은 집으로 이사 왔던 이유는 보증금을 줄여 투자용 소형 아파트를 하나 더 사고 싶었기 때문이었는데 쉽지 않았겠지만 아내는 내 뜻에 따라주었다.


하지만 내가 산 집은 가격이 오르지 않았다. 대신에 우리 같은 4인 가족이 살고 싶어 하는 신축 아파트는 내 월급이 초라해질 정도로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나는 투자에 또 실패한 것이다. 그 실패의 대가는 직접적으로 손실을 입은 것은 아니지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에 충분했고. 무엇보다도 24평의 구축 아파트는 현실이었다.


일부러 좁고 낡은 집으로 옮겨왔는데 내가 산 투자용 아파트의 가격은 미동도 없었고 매달 들어오는 월세는 초라했다. 게다가 곧 있으면 둘째 아이도 태어날 때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머릿속에는 항상 내가 고작 월세 조금 받으려고 가족에게 이 고생을 시키는 건가?라는 죄책감과 올라버린 신축 아파트를 사지 못한 무능함이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나는 나를 완벽히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되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한 스텝들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나가면 된다. 첫 번째는 나의 과거로부터의 과오를 인정해야 했다. 가장 먼저 '사기'를 당했다는 현실을 마주 보기로 했다.


'사기?

당연히 사기 친 놈이 나쁜 거지.

다 감옥에 가야 해.

남의 돈 가지고 장난치고. '


맞는 말이다. 그렇기는 한데. 그런 놈들은 어디에나 있다. 사기 친 놈을 비난하는 걸로는 부족했다. 사기를 당한 나를 정면으로 봐야 했다.


'사기?

당연히 사기 친 놈이 나쁜 거지.

근데 나 그거 왜 사기당했지?

18퍼센트 수익률이 달콤하게 느껴져서 그랬잖아.

아닐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뭘 근거로 그걸 믿은 거야?

충분한 공부도 없이 숫자만 믿고 덤벼든 내 실책이 커.'




상당히 불편했지만 받아들였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나쁜 놈의 말을 쉽게 믿어버린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이걸 인정하자 마음이 편해지고 다음 해야 할 것이 보였다.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한 날. 나는 조용히 컴퓨터를 켜고 앞에 앉아 이 사건을 해결해줄 법무법인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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